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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은 죽지 않았다

책봉질서가 연출한 블랙코미디

by 정영현

1544년 음력 11월 15일, 중종이 서거합니다. 조선은 12월 7일 명나라에 고부청시사[*告訃請諡使: 왕의 부고를 알리고 왕의 시호를 내려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파견하는 사신]를 보냈습니다. 사신단은 명나라의 수도 연경[*燕京: 현재의 베이징]에 도착하였고, 이듬해 2월 2일 선래통사[*先來通事: 부임한 사신이 돌아오기 전에 소식을 보고하기 위해 일정보다 미리 귀국하는 통역관]들이 귀환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고하였습니다.

명나라 예부[*禮部: 외교를 담당하는 부서]에 가서 부음을 알리는 문서를 바치니, 명의 삼사낭중이 물었습니다. "대행대왕[*大行大王: 시호를 받기 전까지 돌아가신 왕을 부르는 칭호, 여기서는 중종]께서는 언제 돌아가셨고 춘추는 얼마셨으며 재위 기간은 얼마나 되셨소?" 이에 사신들이 대답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명의 주객낭중이 물었습니다. "강정왕[*康靖王: 성종의 시호]은 어느 해에 돌아가셨고 양로왕[*養老王: 양위하고 물러난 임금, 즉 연산군]은 언제 왕위에 오르셨소?" 조선 사신들이 대답합니다. "강정왕은 1494년에 돌아가셨고 양로왕은 1495년에 즉위하셨습니다."
이번에는 명의 사제사랑이 묻습니다. "양로왕은 살아 계시오? 병은 나으셨는지?" 조선 사신들이 대답합니다. "아직 살아 계시나, 어지럼증[風眩]이 이미 고질이 되어 방문을 나가지 못하십니다." 사제시랑이 다시 묻습니다. "양로왕의 춘추는 얼마나 되셨소? 자녀는 있으시오?" 사신이 대답합니다. "연세가 이미 70이십니다. 자녀는 없으십니다."

중종은 이 보고를 듣고 말합니다. "선래통사의 말을 들어보니, 이렇게 양로왕을 거론하는 것이 매우 염려스럽다. 혹 중국 사신이 와서 이에 대해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는가? 뒷말이 나오지 않게 조정에서 미리 대답할 말을 맞춰 두도록 조처하라고 삼공[*三公: 곧 영의정·좌의정·우의정]에게 이르라."




위는 『인종실록』의 기사를 정리한 것입니다. 아마 역사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제가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채셨을 겁니다. 여기서 조선은 명나라에 거짓말을 하고 있거든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때는 이미 연산군이 죽은 지 38년이 넘은 시점이었습니다.


연산군은 아시다시피 폭정을 거듭한 끝에 1506년 음력 9월 2일에 신하들에 의해 폐위되고, 중종이 왕위에 오릅니다. 이 사건을 '중종반정'이라고 하는데, 연산군은 고작 2달 후인 11월 6일에 병으로 죽습니다. 만 30살이 되기 고작 며칠 전이었습니다. 그가 폐위된 지 얼마지 않아 그의 어린 아들들도 유배 갔다가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런데 조선은 이 사실을 명나라에 보고하지 못하였습니다. 왜일까요?




한국은 이미 삼국시대 이전, 즉 초기국가시대부터 중국과 관계를 맺어 왔습니다. 한국의 여러 지배세력은 중국의 천자에게 사신을 보내었고, 중국의 천자는 한국의 지배세력에게 '책봉'을 해주는 식으로 관계를 형성하였습니다. 원래 '책봉'이라는 것은 천자가 제후를 임명하는 절차입니다. 그리고 중국과 국경 밖 이민족 국가도 책봉 형식을 빌어 관계를 맺습니다. 중국 천자가 천하의 지배자이며,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중심사상은 '책봉'이라는 절차를 매개로 하여 하나의 질서를 이루는 겁니다. 그걸 '책봉질서'라고 부릅니다. 이 책봉질서는 당연히 불평등한 것으로, 중국 황제는 주군이 되고 이민족 우두머리는 그 신하가 되며, 여러 가지 불평등이 따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포함한 중국의 주변국들은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당시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실질적으로 중국이 최강대국으로 자연히 중심의 역학관계가 형성되어 있었고, 가장 발달된 문화를 가지고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주변국은 이 책봉을 통해야만 중국과의 외교관계가 형성될 수 있었고, 교역을 통해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책봉을 받는 입장에서는 중국에 대해 '대국을 섬긴다'는 '사대(事大)'라는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사신을 보내 조회에 참석하고 조공을 바치고 기타 자질구레한 부탁을 들어주는 것으로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반대로 중국은 책봉국에 대해 '소국을 보살핀다'라는 뜻으로 '자소(字小)'라는 태도를 취합니다. 사신을 내려보내 안부를 묻고, 조공에 대한 답례를 하고, 외적이나 내란 혹은 재난이 있을 때 도와주고, 왕권과 왕실이 안정되도록 보호해 줍니다. 황제가 국왕과 세자를 책봉하고, 왕이 죽으면 시호(諡號)를 내려주는 것도 책봉국의 왕권 안정을 도모하는 역할을 합니다.


왕권을 안정을 시키겠다는 핑계로 내정에 간섭하고 침략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보면, 1010년 거란의 요나라가 고려를 2번째로 침공할 때 강조의 정변을 핑계로 대었습니다. 대국으로서 목종을 폐위시키고 살해한 역적 강조를 처벌하겠다는 겁니다. 또 고려 원종의 경우, 1259년 쿠빌라이와의 강화를 통해 대몽항쟁을 마무리 짓고, 무신집권자들과 싸워 결국 무신집권기를 끝내게 됩니다. 이때 무신집권자 임연이 원종을 폐위시키고 유폐하기까지 하였으나, 몽골의 압력으로 원종을 복위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조선이 건국될 때에도 명나라가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동안 '조선국왕'으로 책봉을 받지 못하고 한동안 '권지고려국사' 혹은 '권지조선국사'라는 호칭을 부여받았습니다. 3대 태종 때가 되어서야 '조선국왕'으로 책봉을 받게 됩니다. 이성계가 공양왕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할 때에도, 그리고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할 때도 '양위'라는 형태를 취한 것도 대내적 명분뿐만이 아니라 명나라에 대해서도 명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이니 제아무리 연산군이 폭군이라 하더라도 신하들이 모의하여 마음대로 왕을 교체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심지어 폐위 두 달 만에 유배지에서 죽었으니 그대로 보고했다간 트집이 잡힐 게 확실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은 중종반정 이후 왕이 교체된 상황에 대해 "전왕이 병이 깊어 부득이 양위했다"는 식으로 명나라에 둘러대어 책봉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후로도 중국에 사신을 보내거나 중국에 사신이 올 때면 으레 전왕인 연산군의 안부를 묻습니다. 그럴 때마다 조선에서는 "여전히 살아서 요양 중이다"라고 둘러대었습니다.


명나라가 이렇게 집요하게 연산군의 안부를 물은 것은 왜일까요? 중종의 즉위 과정에 대해 미심쩍게 생각해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대국인 명나라 입장에서 전왕의 안부를 묻는 것은 일종의 예의이고, 무엇보다 양위한 연산군이 죽으면 시호를 내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조선에서는 폐위시킨 왕이 황제로부터 시호를 받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기를 쓰고 살아있다고 거짓말을 했던 겁니다.


그러기를 수십 년, 연산군에 이어 왕이 된 중종이 먼저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이때 다시 명나라는 전왕의 안부를 물었던 겁니다. 조선의 사신들은 또다시 "연산군은 살아 있다"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신들이 돌아와서 이를 보고하자, 조정에서는 변명할 말을 맞춰두자는 식으로 논의가 진행되었던 겁니다.


그러면 연산군이 죽었다고 명나라에 보고된 것은 언제일까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어느 시점이 지나자 명나라도 거기에 대해서 묻는 것을 잊어버린 겁니다. 그로 인해 연산군은 명나라로부터 시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조선의 바람 대로 된 셈이죠. 결국 연산군의 부고보다 명나라 멸망이 더 먼저 찾아오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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