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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13년, 남해안 적조 발생

유성이 떨어졌으니 해괴제를 올려라

by 정영현

2018년에 나온 서영상·박종우·황재동·민승환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왕조실록』에 적조에 대한 기사가 81차례나 나온다고 하는데, 아래 내용은 그중 한 사례입니다. 원래는 부산 지역 바다에 관한 기록이라 스크랩해 둔 건데, 사료 원문에다 제 해설을 덧붙여서 이야기로 풀어봅니다. 본문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서비스 중인 『조선왕조실록』 번역문을 베이스로 삼고 원문을 참조하여 표현을 다듬었습니다. [*] 안쪽은 제가 주석으로 단 것입니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바닷물 색깔이 변하였다.

순천부(順天府) 장성포[*長省浦: 현재의 여수 쌍봉동, 장생포라고도 함]에서는 물이 15일부터 붉어지기 시작하여 20일에 이르러서는 변하여 검은색이 되었는데, 고기와 새우가 죽어서 물 위로 떠서 나왔다. 만약 물을 길어 그릇에 부으면 그 빛깔이 평소와 같았다.

양주 다대포[*多大浦: 현재의 부산 장림]에서는 18일에서부터 20일에 이르기까지 물이 붉어지고, 27일에서부터 28일에 이르기까지 또 붉어져, 고기가 죽어서 물 위로 떠서 나왔다. 물을 퍼서 그릇에 담으면 응결되어 끓인 우무[牛毛]의 즙(汁)과 같았다.

절영도[*絶影島: 현재의 부산 영도구]에서는 18일에서부터 20일에 이르기까지 물이 붉어졌다.

동래 외평[*外坪: 부산, 정확한 위치는 미상]에서는 21일에 물이 붉어졌다.

부산포[*富山浦: 동천 하구 좌천동 일대]에서는 27일에서부터 28일에 이르기까지 물이 붉어졌다.

견내량[*見乃梁: 통영과 거제 사이, 거제대교가 있는 해협]에서는 21일에 물이 짙은 붉은색이 되어 고기가 죽었다.

번계포[*樊溪浦: 현재의 경남 고성군 당항리, 나중에 당포로 바뀜)에서는 21일에서부터 24일에 이르기까지 물이 붉고 누런 빛깔이 되어 고기가 죽었다.

두모포[*豆毛浦: 부산 기장군 죽성리]에서는 20일에 물이 붉어졌다.

포이포[*包伊浦: 포항 모포리]에서는 20일에서부터 21일에 이르기까지 물이 붉어졌다.

창원부 도만포[*都萬浦: 창원시 다구리] 등지에서는 21일에 물이 붉고 검어져 고기가 죽었다.

진해[*鎭海: 창원시 마산합포구에서 진동·진북·진전면 지역]에서는 21일에 물이 담황색이 되고 고기가 죽었다.

기장[*機張: 부산 기장군]에서는 20일에 물이 붉고 누렇게 되어 전복과 조개[鮑鮯], 고기가 모두 죽었다.

흥해[*興海: 포항 북부 지역]에서는 21일에서부터 23일에 이르기까지 물이 붉어져 고기가 죽었다.

임금이 말하였다. "천구[*天狗: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유성. 천구성]가 떨어지면 이러한 변이 있다. 제사 지내는 것은 무익하나 지난해에도 이러한 변이 있어서 사람을 보내어 제사 지냈으니, 지금도 또한 해괴제[*駭怪祭: 해괴한 일이 일어났을 때 이를 막기 위해 지내는 제사]를 행하는 것이 좋겠다."

검교 공조참의 최덕의를 전라도에, 판서운관사 애순을 경상도에 보내어 제사를 행하였다.

- 『태종실록』 13년(1413) 7월 27일


여기다 제가 몇 마디 설명을 덧붙이겠습니다.

'양주 다대포'라고 되어 있는데, 다대포는 당시 동평현 관할이었습니다. 동평현은 고려시대에 양주(현재의 양산시)의 속현이었고, 1405년 동래현으로 이속되었다가 1409년 다시 양주군로 돌아가고, 1428년 다시 동래현의 속현이 됩니다. 그러므로 1413년에 다대포는 양주 소속으로 나온 겁니다. 조선 초 다대포는 조금 더 북쪽 장림 지역에 있었는데, 성종 무렵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합니다. 절영도 역시 동평현 소속이었습니다.

'동래 외평'의 경우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으나 당시 동래현의 영역으로 보아 남구-수영구-해운대구 등 현재 동부산 지역의 바다로 볼 수 있습니다.

'부산포'는 당시 동평현 소속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선 성종 대 이전에는 부산을 한자로 '釜山'이 아니라 '富山'이라고 표기하였습니다.

'기장'의 경우, 그 며칠 전인 7월 24일 기사에 '기장 임을포(林乙浦)에서부터 가을포(加乙浦)에 이르기까지 물이 황·흑·적색으로 변하였는데, 농도가 죽 같고, 전복과 잡어가 모두 죽어서 물 위로 떠올랐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임을포'는 현재의 장안읍 임랑리이며, '가을포'는 당시 기장의 영역이었던 해운대구 송정입니다. 즉 '임을포에서 가을포'라는 것은 기장 바다의 최북단에서 최남단까지 모두 적조가 발생했다는 뜻입니다.

'서운관'은 조선 초 천문(점성)과 지리(풍수), 역법(택일)을 담당하는 관청으로 나중에 '관상감'으로 개편됩니다. 이때 파견된 애순은 서운관의 수장인 판서운관사이며, 검교 공조참의 최덕의는 전임 판서운관사였습니다. 당시 적조 사건의 원인에 대해 '천구성(유성)이 바다로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서운관의 관료를 파견하여 해괴제를 올리도록 한 것입니다. 서운관은 이외에도 각종 기상이변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역할을 했습니다. 해괴제에 대해서는 2006년 권용란의 연구가 있습니다.

한편으로 태종이 '천구가 떨어지면 이러한 변이 있다. 제사 지내는 것은 무익하나…'라고 말한 것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태종 이방원 스스로가 고려 말 신진사대부 출신으로, 천문에 관심이 많고 미신을 배격했습니다. 그런 성향이 그대로 드러나는 발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괴제를 지내는 것은, 전례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백성들은 안심시키기 위함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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