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여덟 해를 함께 살았지만 우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 울엄마 힘들게 하지 말라며 소리를 꽥 지른 적도 있었다. 매년 설이 되면 엄마에게 올해는 아들을 낳으라 하셨던 것도 기억난다. 언니가 생후 백일 정도 밖에 되지 않았을 때 엄마는 나를 가졌고, 빈혈로 쓰러져 병원에 가서야 그 사실을 알았단다. 지우려 했었지만 할머니가 아들일지 모르니 낳아보라고 해서 어쩔수 없이 낳았다고. 하지만 또 딸이었고 그게 나다.
이을 '승(承)'에 완전할 '완(完)' , '대를 완전하게 잇는다'는 뜻. 할머니가 작명소에 가서 당시 큰돈이었던 10만원을 주고 지은 내 이름이다. 물론 '후남'이나 '종말'이, '필남'이 보다는 낫다지만 위로가 되지 않는다. 다음엔 꼭 아들이어야 한다는 바람과 의지를 왜 다른 사람의 이름에 담는것인가! 어쨌든 덕분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셈이다. 생명의 은인이라고 해야하나. 심지어 '괴팍하고 이기적인 성격'이 할머니를 똑 닮았단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외아들 답지 않게 아빠는 효자가 아니었고 할머니 역시 희생과 인내의 아이콘 '한국의 어머니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서로 거의 말을 섞지 않았던데다 식사도 따로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할머니는 홀로 되고 나서 어린 아들은 친정에 맡겨 놓고 나가 사셨다 한다. 아빠를 대신 키워주시다시피한 '대치동 숙모할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가끔 들러서는 아들이랑 하룻밤도 같이 안 자고 가버렸다고.
할머니는 1927년에 경기도 안성의 아흔아홉칸집에서 7남매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예전에 어릴 적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심각한 하체 비만형 몸매가 어릴때도 그대로였다. 숙명여고를 나온 재원으로 고향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었지만 결혼이 늦은 편이었다. 할아버지는 다섯 살 위로 할머니의 큰오빠 동창. 아빠는 1950년 6월 14일,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열하루 전 태어났다.
현대사의 비극이 교과서와 TV가 아닌 우리집 얘기일 줄이야. 할아버지는 갓 태어난 아들과 부인을 두고 이념을 따라 북으로 갔다. 아기, 그러니까 나의 아빠를 목욕시키다 친구가 전쟁이 났다며 부르자 나가선 그 길로 돌아오지 않았다. 충격은 둘째치고 그 당시엔 '빨갱이 가족' 딱지는 패가망신을 부르는 무서운 주문과도 같았다. 할머니의 친정에서는 할아버지가 '월북'이 아닌 '실종'으로 기록에 남도록 재판을 했고, 집 한 채 값을 판사에게 뇌물로 먹여 원하는 판결을 받았다.
남편의 생사조차 몰랐지만 한국전쟁 내내 좌우익 양쪽에 번갈아가면서 끌려가 고문과 취조를 받았다한다. 그 삶이 어떠했는지 감히 상상할 수 조차 없다. 내가 대학 졸업 후 KBS에 계약직으로 입사할때 신원조회서를 작성했었다. 경찰, 국정원, 회사 이렇게 세 군데 제출, 보관되는 서류의 질문 중 하나가 '8촌 이내의 친척 중 공산당에 가입했거나 가입한 적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였다. 벌써 이십 년 전 얘기지만 그 옛날 집 한 채 값을 들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할머니는 영어와 일본어를 할 줄 알며, TV는 일절 보지 않았지만 아침마다 3대 일간지와 2대 경제지를 완독했다. 하지만 종교에 빠져 재산을 노린 목사에게 사기를 수차례 당하면서도 그 고리를 끊지 못했고, 비만으로 고혈압과 고지혈증이 있었지만 고기를 못 먹어 저혈압이 온거라 우겼다. 찬송가를 큰 소리로 부르거나 기도하며 시간을 보내셨는데, 두 손녀딸들이 '골짜기의 백합화처럼 순수하고 신실한 여성으로 자라게 해달라'는 구절이 꼭 들어갔다.
양쪽 무릎 수술하셨을 땐 대소변 문제로 며느리인 엄마를 엄청나게 고생시켜 옆 베드 환자들이 치매를 의심할 정도였다. 병문안을 바로 가지 못했는데, 나 죽은 다음에 오지 그랬냐고 야단을 들은건 애교에 불과했다. 그러나 길에서 미끄러져 다치신 후엔 급격히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잃으셨다. 마지막 한 달 동안 당신이 알아보는 사람은 큰 손녀딸인 언니가 유일했다. 그 때 할머니는 아빠를 관리 아저씨라 불렀는데, 그 둘이 함께한 시간 중 가장 사이가 좋아 보였다.
그 정신에도 모든 사진을 다 찢어버리고 주변정리를 해놓으셨는데, 딱 한 장 할아버지와의 결혼기념 사진만은 남겨놓았다. 뒷장에 '지난 날의 추억'이라고 씌여진 글씨에서 아련한 슬픔과 회한이 느껴진다. 그렇게 주변 정리를 마치고 아직은 많이 춥지 않았던 초겨울 새벽, 할머닌 주무시다 편안한 표정으로 영원한 안식에 드셨다. 난 해마다 할머니의 기일이 되면 즐겨 부르시던 찬송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의 멜로디를 떠올리며 당신을 추억한다. 당신을 많이 닮은, 그러나 마지막 순간 손 한 번 잡아드리지 못했던 못난 손녀딸이 후회와 그리움을 담아...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내 뜻과 정성 모두어 날마다 기도합니다
내 주여 내 발 붙드사 그 곳에 서게 하소서
그 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