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너와 가까워 지는 법

by 창작몽상가

새벽과 아침 사이 즈음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안개가 자욱하다.

푸르스름한 새벽의 색과 뿌옇게 희미해진 공기가 어우러져 스산하면서 차분한 분위기가 연출됐어.


이런 날이면 괜스레 내가 지내온 나날들 속의 기억을 곱씹으면 한 발짝 멀리서 지켜보는 여유로운 시야가 생기는 것 같아. 뭐 당장 눈앞의 시야는 흐려졌지만, 또 다른 차원 속에서 시야를 갖게 되는 그런 기분이랄까.


눈을 다시 비벼봐도, 창문을 열어봐도 이 흐릿함은 여전해.

사진을 찍겠다고 핸드폰을 들었는데 그때마저도 혹시나 해서 카메라를 괜히 닦아 봤는데 역시나 달라지지 않아.


난 마치 세상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가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평정할 수 있는 기운이라도 얻게 돼서 모든 것이 흐리게 보이는 것 같아서 나 자신이 갑자기 위대한 사람이라는 기분이 들어.

그러니 큰 일을 해내려면 작은 일들에 매달리지 않아야 해, 위대한 사람은.

이라는 생각을 끝으로 위대하지 못한 나는 평소와 같이 자잘 자잘한 잡생각을 시작했고.



커피를 내리고 우두커니 창을 바라보는데

너의 새벽은 어떨까 아니, 어땠을까 싶어서.


나보다 시간을 앞선 네가 생각났어. 너의 시간은 나의 것 보다 먼저 가고 있어.


직관적인 말로는 ‘시차‘.

멋지게 말하려니 '시간을 앞선 자'.

오 되게 멋져 보여.


어쩔 때 나는 이 시차라는 것이 참 신기하고도 신비해.

무슨 마법 동화 속에나 나오는 일 같다고 아름다운 생각을 하지.


어쩌면 나라가 다른 곳에 동시에 살면서 시차를 둔 것은 마법사들이 만들어 놓은 일종의 비장한 정책 같지 않니.

한 번에 너무 많은 사람들을 같은 시간에 두면 하늘세계의 질서가 과부하되고 흐트러질 수도 있으니까 어떤 나라는 조금 먼저 앞서 가고 또 어떤 나라는 뒤에 따라가고.

마법사가 있다면 그들 중에도 위대한 자들이 있을 테고이 ‘위대한'의 카테고리에 있는 자들의 판단은

왠지 그랬을 것 같은데.


내가 조금 엉뚱하지. 이런 상상을 즐겨하곤 해.

이런 상상을 하는 사람의 일들은 인간 세계에서 어떠한 눈에 띄는 '효과나 효능'은 없을 테지만 이를 창작으로 연결시키는 일은 아무리 개인적인 일이라고 해도, 또 사회적으로 눈에 띄거나 누구보다 돋보이는 '사회적 성과'를 내지는 못한다 해도 이 행위들로서 '어떠한 가치를 담은 영향' 정도는 뻗어 낼 수 있을 거라 믿고 있기 때문에 멈추진 않으려고.




나의 새벽은 너에게 있어서 벌써 오후이고 네가 만나는 하늘색은 나와의 것과 같지 않아.

나의 하늘은 이렇게 안개가 드리웠는데 너의 하늘은 그렇지 않았겠지.


그래서 궁금했어.

너의 눈앞에는 어떤 색깔의 향연이 펼쳐져 있을까, 너는 그것을 제대로 보고 있는 건지.

앞선 시간은 너에게 무엇을 할 수 있게 허락해 주었을까?

수많은 선택 중에 어떤 선택을 했을까?

옷은 뭘 입었고 점심은 어떤 메뉴로 골라 먹었고, 누구를 만났을까?

무슨 이야기를 하고, 들었으며 그로 인해 어떤 영향을 받고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네가 맞이한 아침의 멍 때림 속에는 어떤 자잘한 생각이 있었을까?

그 속에는 내가 조금이라도 있었을까?



이렇게 펜을 굴리다 보니 점심이 되었어.

안개가 나지막이 점점 사라지면서 앞 건물에 한창인 공사의 크레인이 찐하게 드러났다.

이제 좀 내가 알던 그 현실이 다시 보이네.


저번에 부모님 집에 갔을 때 운동으로 계단 오르기를 했어.

처음엔 그냥 내 시야를 전부 차지하는 화단의 나무들이 보였어. 점점 위로 올라 갈수록 앞에 있던 큰 건물들의 면들이 보이면서 그 건물들에 얽혀있는 배수관도 보이고, 앞의 길들도 고르지 못해 웅덩이가 있는 곳도 있고 울퉁불퉁.


그 왜, 숲을 가면 나무만 보지 말고 숲 전체를 보라고 하잖아. 그래야 새도 만나고 나무의 열매도 보고.

그 말이 생각났어.


계단의 일층에서는 나무만 보였어. 내 눈앞에 당장 있는 것만. 어느 정도 올라가서 보니까 빌라와 주택들의 모습이 보이는데 지붕이 없다 보니 그 안이 뻥 뚫려서 옥상이 보이는 거야.

숲 전체를 보려고 비장하게 다짐했던 나를 뒤로하고 갑자기 그 모습들을 보니까 머릿속이 꽤나 시끄러워지더라. 뭔가 속속들이 속내가 다 들리는 것 같달까.


그 옥상들의 전경을 항상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볼 때는 몰랐지.

그런데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니까 그 안에 있던 지저분한 것들이 전부 보이는 거야.


어떤 집은 빨래를 주렁주렁 놓기도 하고 안 쓰는 살림살이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질 않나 바닥이 빗물에 부식돼서 얼룩 같은 게 보기 싫게 되어있고. 어떤 차는 주차를 반듯이 잘했지만 반면 또 어떤 차는 살짝 삐뚤게 해 놓고 방향도 다 다르게 하니까 보기에 조화롭지 않고.

정렬되지 못해서 질서가 다 엎어지고 뒤죽박죽 해.


다들 살겠다고, 살아보겠다고 무언가 살림살이를 장만하고 이용하고 나름대로 정리도 해놓고 했지만 각자의 방식이 전부 다르니까 결국 위에서 볼 때는 '난리' 그 자체.


세상이 이렇게 지저분하구나,

이렇게 시끌시끌한 게 ‘세상의 속’ 이구나.


아파트 비상구 계단 통로에는 소음이 아예 하나도 없는데 밖을 쳐다보니 귀를 찌르는 소음이 있는 것 같고 머리가 지끈 할 정도로 시끄러운 모습들이 펼쳐져 있었어.

그래서 이렇게 사는 게 만만치가 않은데 정말 다들 애쓰는구나를 생각하며 혀를 차고 또 열심히 올랐어.



한 이십 층 정도 가니까 신기하게도 갑자기 세상 소음이 음소거 버튼이 눌러진 것 같더라.

그 시끌시끌한 모습도 그냥 하나의 작은 점이 되는 거야. 눈에 하나하나 다 보이던 얼룩이며 살림이며 그런 것들이 전부 그냥 점이 되어있었어. 이 색깔 저색깔 다 달라서 혼란스러웠던 난잡한 모습도 위에서 보니까 색이 점점 뿌옇게 변하더라고.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갑자기 마음이 확 풀렸어.

답답했던 무언가가 확 트이면서 동네에 있던 산에 가려졌던 아파트도 네모네모 창문까지 다 보여서 눈이 아팠는데 위에서 다시 보니 그냥 하나의 깔끔한 네모 덩어리로 보이고.

산도 꼬불꼬불 나뭇잎의 결이 다 보였는데 , 정원사가 재단해 놓은 것 마냥 단정하고 눈에 보기 좋은 크기로 변해 있더라.


삼십 층 정도로 올라가니까

와. 세상이 너무 조용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거야.

도시 풍경이다 보니 빽빽하게 꽉 꽉 채워져 있지만

이 세상은 그 새 틈을 벌리고 열심히 굴러가고 있다는,

기적.


너무나 고요해 보이는 거 있지?

그 고요 속에 서있는 내가 오히려 비현실적이었어.

사진인가 그림인가 싶을 정도로 가만히 아무 소리 없이 멈춰있는 조형물과 자연물을 보는데 그 옆으로 정말 작은 콩알처럼 보이는 자동차만 왔다 갔다 움직이는데 마음속이 평화로워지더라고.


정작 저 밑의 현실은 클랙슨이 여기저기서 울리고 심각한 교통체증에 급브레이크를 잡기도 하고 움직이는 사람과 차들이 섞여서 난리가 났을 텐데 말이야.



그런데 마지막 꼭대기 층에 오르고 보니까 좀 기분이 이상했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정돈된 세상이 보기에는 너무 좋은데

갑자기 모든 게 가짜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리가 풀리는 것 같고 아찔하더라.


적당히 멀리 갔어야 하는데 너무 너무나 멀리 가서 그랬나 봐.




내려오는데 찰리 채플린이 한 말이 딱 생각나는 거야.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정말인지 나는 구슬픈 현실에서 항상 떨어져 나가려고 발버둥 쳤던 것 같아.

그래서 자주는 사람들과 함께 같은 속도, 같은 위치로 가지 못할 때가 많아서

홀로 멀리로 훌쩍 가서 조용히 상상을 하고 몽상을 해.

내가 등장하는 이 동화 속을 희극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나 봐.


나는 늘 멀리 떨어져 있었네. 지금도 그렇고.



이런 생각을 해.

어떤 사람과 가장 가까워지는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람과 조금 멀어지는 것이라고.



현실의 거리로서는 네가 나에게 있어 아주 멀리 있지만

마음속 거리로는 정말 가까이에 있어.

이유는 아마 네가 내 이야기를 듣지 못하니까, 우리가 말을 하지 못하니까, 오해가 생기지도 상처를 주고받을 수도 없으니까 그럴수록 나는 야금야금 너와 거리를 점점 더 좁혀.


넌 알지 못하겠지만

나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지금 가장 가까이에 있어.

알 수가 없을 거야. 각자 사는 방식이 다르듯 각자는 관계 속의 방식도 달라서

나의 '가까워지는 방식'과 너의 '가까워지는 방식'은 너무도 다를 테고.


그래서 지금 너와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는 내가 있다면 반대편엔 나와 많이 멀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네가 있을 수도 있겠구나.


아마도 너의 기준에서 조금 멀어졌을 나는 ,

네가 원하면 나의 방식이 아닌 너의 방식으로 다가가서 다시 '가까워' 져 보도록 해보려고.

그렇게 해서 우리의 거리가 다시 좁혀질 수만 있다면.



이제 안개가 완전히 다 걷혔으니 애꿎은 카메라 렌즈를 닦아내지 않아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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