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망설이지 말기로 해

by 창작몽상가

나무들이 헐거워졌어.

드물게 여전히 노란 잎 몇 장을 붙이고 서 있는 나무를 보면서 몽상은 시작돼.

왜 유독 그에게만 계절이 멈춰버린 거지?

왜 하필 수많은 나무 중에 너만이 여전히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걸까.


계절은 무뎌진 사람을 흔들어 깨워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아.

이제 추운 바람이 불 거라고.

앞으로 더 차가운 바람이 불어 닥칠 테고.

옷깃을 더 단단히 동여 매야 한다고.


일상 속에서 무뎌지기 시작하던 몸에 이 변화를 직접 보고 경험하는 중이니 이제는 현실을 맞이하라며 이 세상을, 사람들을 통째로 흔들어 대는 그게 계절 같아. 무엇보다 현실과 가장 일차원적인 연결을 시켜주는 것 또한 계절이야. 옷장에 박혀있던 옷가지도 다시 꺼내야 하고 한동안 쓰지 않을 테라스의 용품도 들여놓아야 하고 어쩔 수 없는 잡다한 현실적인 일거리를 가져다주잖아.





계절이 바뀌는 게 조금 아쉬워서 산책을 갔다가 오는 길에 아직도 빨갛게 물들어 있는 작은 나무에 잎이 몇 가닥 남아 있길래 세잎 정도를 떼려고 했어. 그런데 내가 잡으려고 하니까 분명 나뭇가지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것들이 아주 살짝 닿기만 했는데도 우수수 떨어지더라.

마치 누군가 손을 내밀었는데 고맙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주체 없이 와르르 무너져버릴 때가 있는 것처럼.


'얘들은 그냥 확 떨어져 버리지 왜 이렇게까지 매달려서 버티고 있는 걸까.

어차피 스치기만 해도 떨어질 정도로 겨우 붙어 있는 거면서..'



계절이 바뀔 때 우리의 마음가짐이 달라지기도 하는 것처럼

사실 난 계절이 지나면 우리의 서먹함이 조금 사라질까 했어.

물론 한 번의 계절로는 되지 않았을 거야. 그 순환이 여러 번 반복되고 또 반복되다 보면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서먹함은 그대로 남았어. 그리고 점점의 무뎌짐만 자라나고 있음을 느꼈지.


계절이 무뎌진 사람들을 흔들어 깨워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고 말 한지 몇 분도 채 안 돼서, 계절은 무뎌짐만 남긴다는 말을 하고 있는 나는 내가 봐도 알 수 없고 특히 변심도 변덕도 심해.


난 어쩔 때는 어른이 되어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아니까 상관말라고 잘난 척을 하다가도 불리한 상황이 되면 아직은 어려서 그런 거라고 얼버무려. 사회적으로는 어른이 맞지만 그 또한 내가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바꿔. 그리고 어쩔 때는 되게 성숙한 어른처럼 행동하고 또 어쩔 때는 완전히 어리숙한 소녀 같은 콘셉트를 원하기도 해.


어른이 덜 된거지. 지금은 이렇게 생각, 마음, 신념, 추구하는 가치 등 까지도 갈팡질팡 왔다 갔다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어. 이제야 나는 진정한 내가 되기 위한 일종의 '설계'를 하는 단계야.

내 나이 또래의 친구들은 이미 '건축'의 단계에서 나아가 마무리를 하고 '정비'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일거야. 그런데 삼십 대 중반에 이제 겨우 설계라니.

나이에 비해서 많이 늦은 걸 알아 불안하긴 한데

더 불안한 건 이러다가 더 많이 늦어서 앞으로 살아가면서 한 번도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잘 모르기 전에, 그게 너무나 무서워서라도 나는 지금부터는 나를 제대로 찾으려고 마음먹었어.

그러니 내 말이 왔다 갔다 해도 [신념을 세우기 위한 '설계'를 하는 단계]라서 그런 것이니 너그러이 이해해 주었음 해.




언젠가 봄에 만나 서먹한 너와 산책을 했다. 그때 벚꽃, 매화꽃 들이 어찌나 예쁘게 폈는지 우리가 걷는 거리가 전부 분홍 빛깔로 물들어 있었지. 어색함도 잠시 잊은 채 자연을 만끽했어.


나는 계절을 직접 만져보고 나의 방식으로 간직하는 것을 좋아해. 다른 말로 계절이 내려 준 산물을 감사히 여기고 즐기는 방법이 조금은 직관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진짜 쓸데없는 욕심이지만 정말 예뻐서 그 매화꽃의 나뭇가지 한 가지를 꺾어 가져가 집 식탁 위에 올려 장식하고 싶었어.

집에서 밥을 먹으면서도 산뜻한 봄기운을 내내 느끼고 싶었던 거지.


'나무 한 가지 정도 끊으면 어때'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와 같은 생각을 백 명, 천명이 한다면 더 이상 나무들에 꽃이 없고 자연이 파괴될 텐데..라는 죄책감이 들어 자연에게 미안하면서도 내 욕심을 채우고 싶어서,

아무래도 한 가지를 꺾어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나는 이야깃거리가 생겨서 기쁜 마음에 슬쩍 나의 야심 찬 계획을 네게 말했지.

그리고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어.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는데 드문드문 지나가길래, 심장이 벌렁벌렁 해졌고.


첫 번째 시도는 실패.

꺾으려 하니까 나무가 은근히 질겨서 내 생각처럼 안 꺾어지길래 소심한 실랑이를 벌이다가 누군가 지나가길래 그냥 놓아버렸어. 그래서 걷는 내내 점점 풍경을 즐기지 못하고 망을(?) 보면서 불안해 하기 시작하자 네가 와서는 왜 안 꺾는 거냐고 물었지.

난 다른 사람들도 있다 보니 떨리고 망설여진다고 했어.


그리고 두 번째 시도를 하려는데 아무래도 이건 불법 같고 양심에 너무 가책을 느껴서 그냥 포기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찰나에 갑자기 네가 내 앞으로 불쑥 나타나더니 내 눈앞에 있던 매화가지를 사정없이 낚아채더니 엄청나게 커다란 가지를 푹 끊어버렸어. 그리고 바로 앞에는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지.


내가 생각한 건 아주 작은 가지였는데, 게다가 너는 매화꽃이 주렁주렁, 복슬복슬 붙어있는 왕가지(?)를 과격하게 퍽 꺾어버리더니 나에게 툭 건넸어.


순간 나는 고마우면서도 조금 당황했지. 이렇게 까지 많이 가져가려는 의도도 아니었고 이렇게 까지 해서 꼭 가져가려고 했던 것도 결국엔 아니었고. 그럴 배짱도 되지 않고.

그런데 어쩌겠어. 이미 그 토실토실한 매화가지는 내 손에 있었는데.

엎질러진 물이니까 잘됐다 싶어 집에 가서 정성스레 장식하고 예뻐해 주기로 마음먹었지.



차를 타고 집에 가면서 나는 나를 위해서 용감하게 자연을 파괴한(?) 네가 너무 대담해 보였어.

그래서 네게 어떻게 그렇게 과감하게 할 수가 있었느냐고 가볍게 물었는데,

너의 대답은 참 신선했어.


'내가 어떻게 그렇게 한거냐고.. 뭐 나라고 사람들 신경 안 쓰고, 나무 보호 하고 싶지 않겠어?


근데 네가 무언가를 하기로 결정했을 때는, 그때는 더 이상은 망설이면 안 되는 거야.

네가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그게 심지어는 도둑질일지언정 그때는 그냥 해야 돼.'


그동안 내가 진짜 어른스럽지 못했던 모습 중 하나가 항상 갈팡질팡 망설임. 우유부단.

마음먹고 하기로 해 놓고서 갑자기 자신감이 없어지거나, 걱정이 되고 불안이 앞서면 말을 번복하고 결국 하지 않고서 생각이 바뀌어서 안 하게 되었다고, 핑계를 찾아 말해버리는 무책임한 행동.

이것이야 말로 진짜 내가 어른이 되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였다.


내가 만약에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했던 거라면?이라는 불안감 때문에

잘하다가도 변심 또는 중도포기.

나에게는 결정이라는 게 항상 애매했다.


'결정'은 내렸지만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아주 좋게 말하면, 융통성.

사실을 말하자면, 결정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하는 무책임.

극단적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자신감 결여와 결정 장애.


너는 진짜 진정한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한 말, 네가 한 결정에 어떻게 해서든 책임을 지는 것. 그리고 끝까지 가는 것.

그것이 비난이든 뭐든 그냥 너는 묵묵히 네가 한 결정에 있어서는 전부 다 짊어지고 가라는 담대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날 이후부터 은근하게 시작되었던 것 같은데, 나는 아주 감사히도 쓸데없는 말 수가 줄어들었어.

지나가는 말로라도 나 뭐뭐 할 생각인데 또는 하고 싶은데 라는 말을 좀처럼 잘 안 하게 되었어.

내가 그런 포부를 말했을 때, 사실 진심으로 격려해 주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도 한데, 무엇보다 결과 지향적인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그래서 너 그때 말한 그거 시작은 했어? 한다면서 왜 안 하고 있는 건데?'라는 약간의 비평이 섞인 말들을 자주 돌려받긴 했지.

그래서 이제는 내가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는 너무 쉽게 떠벌리지 않는 침착한 사람이 되었어. 그렇다고 해서 결정을 하는 게 더 어려워진 것도 아니야. 결정을 내리는 것이 조금 더 편해졌어.

왜냐면 네가 한 말속에 '너 자신을 믿으라'는 말이 없었는데도 나는 그 말을 읽어냈거든.

나를 누구보다도 밀어주고 또 믿어주기로 했어.


네 덕분에 전보다 단단해진 기분이 들어. 네가 나에게 작정하고 가르침을 주려고 한 말도 아닌데, 우연히도 그때 그 말이 나에게 정말 필요한 말이었고 그래서 그 말을 네가 한 의도 이상으로 확대 해석 했어.

그리고 그 말이 나에게 가치관 '설계'에도 도움을 정말 많이 주었던 말 중 하나가 되었고.


내가 도둑질을 결심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내가 잘 알기 때문에,

나를 전보다 조금 더 믿기 때문에, 이제는 좋은 결정 나쁜 결정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냥 내가 그 당시에 어떤 방향을 원하는지가 제일 중요한 것이고.

그 결정에 대한 책임만 직접 잘이고 가면 된다는 것을 배웠어.





지금도 나는 네가 내리는 결정들을 지켜보는 것을 정말 좋아해.

너는 정말인지 논스톱이야. 무언가를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면 뒤도 안 돌아봐. 다른 사람 말도 더 이상 안 들리고 그냥 직진. 그런 너를 보면 희열이 느껴진달까.

솔직히 너는 남들은 걱정이 앞서서 못 할 일들도 항상 과감하게 시도하고 또 그것을 어떻게든 해내.

번복이란 없지. 후진도 없어.


나는 그래서 네가 저지른(?)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을 매우 즐겨.

그 과감함이 내 속을 아주 시원하게 긁어줘서 대리만족도 있고.

나는 아직 너처럼 간이 커야만 하는 결정들까지는 혼자서 내리지 못하지만 너의 영향을 받아서 언젠가는 비슷한 레벨이 되기를 꿈꿔 봐. 그러려면 나는 아직 더 많이 단단해져야 해.


나는 지금도 그날의 봄을 뚜렷하게 기억해. 그리고 이 겨울이 지나면 찾아 올 다음 해의 봄이 기다려져.

매화나무를 보면서 또 네 생각을 할 테고, 그때 배웠 던 것들을 가슴과 머리에 되새김질하면서 흔들리는 마음을 다시 가다듬을 테니까.


겨울이 많이 길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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