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중심에 대해 깊이 생각하라.
저희는 지난주부터 히브리서 저자가 전한 믿음을 세우라는 충고에 대해 세 가지 주제를 나누어 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인 '깊이 생각하라'는 제목으로 여러분과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집을 비유로 들어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첫째는 집을 지은 자, 집을 맡은 아들, 그리고 집에서 일하는 종의 신분을 구분하여 나타냅니다. 그 당시 유대교를 따르는 자들에게 율법은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이었고, 그들은 그 율법을 자신들에게 전해준 모세를 가장 중요한 인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모세에게서 시선을 멈춘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시선을 더욱 확장시켜 줍니다. '너희에게 계명을 준 모세, 그러나 그 모세에게 계명을 준 것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 계명의 주인은 누구인가?' 우리는 특정한 생물체를 보면 지금까지 잘 정립된 과학적인 접근 방식을 통해 생물학적 유전자를 토대로 그것의 조상을 특정화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그러한 생물체들은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진화되어 왔으므로, 그들의 과거 모습이 어떠했는지 다양한 방법으로 발견하고 추론해 내는 것은 과학이 하고 있는 중요한 일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과학이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입니다. 과학의 발전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물리적, 생물학적 출처를 밝히는 것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이유를 정의 내리지는 못합니다. 의사가 사람의 몸을 배울 때, 몸이 반응하고 작용하는 수 없이 많은 과정을 탐구하고 실험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의 몸에 대해 믿기 힘들 만큼의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배우는 것은 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배우는 것이지, 근본적으로 사람의 몸이 그렇게 만들어진 이유에 대해 정의를 내리지는 못합니다. 꼭 의사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매번 보는 우리의 몸을 보십시오. 다치면 회복됩니다. 병원에 가면 필요한 대처와 회복의 과정에 대해 의사는 말할 수 있지만, 회복이 되도록 만들어진 이유에 대해 말할 수는 없습니다. 머리카락은 끝없이 자라서 미용실에 가야 하지만, 눈썹은 더 이상 자라지 않는 것에 대해 어떤 전문가는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진 모르지만, 그렇게 지어진 창조주에 대해 설명해 주진 않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이처럼 우리가 과학으로 지식으로 밝혀낼 수 없는 창조 섭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야외예배를 드리면 세상에 지어진 모든 것들을 보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곧게 뿌리내리고 푸릇푸릇한 나무를 보며 하나님을 발견하고, 알지 못하는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마치 하나님의 입김 같고, 한없이 높게 떠 있는 구름은 마치 하나님의 발등상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과학이 이 모든 과정을 설명해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 과정이 궁금한 것이 아닙니다. 작은 씨앗이 땅에 들어가 큰 나무가 되도록 설계하신 분, 바다의 수증기가 하늘에 구름을 만들고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비를 뿌리도록 계획한 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모세는 종입니다. 그렇다면 종이 섬기는 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있다는 것은 그 아버지와 집주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히브리서 저자의 충고처럼 우리가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모세의 율법을 바라보는 유대인들처럼, 세상의 법칙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학자들처럼 마치 주인이 없이 없이 우연히 존재하는 피조물 중 하나로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줄 때, 그 율법을 목적은 단순히 지켜 행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율법을 주신 주인인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보다 중요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 모든 율법이 가리키는 사랑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는 것이 율법이 이 땅에서 갖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것에 매달려 오히려 그 중심을 잃어버린 유대인들이 정작 율법의 목적이었던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왔을 때 그를 핍박하고 십자가에 매달고 죽이는 장본인이 되어버렸습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종을 보면 그가 섬기는 주인을 깨닫지만, 어리석은 자는 종이 주인의 뜻을 행하는 것을 보고도 주인의 존재를 깨닫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21장에는 예수님께서 포도원 비유를 들어주십니다. 한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으로 떠납니다. 열매를 거둘 때가 되어 종들을 보냈는데, 하나는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또 하나는 돌로 칩니다. 그래서 다음번에는 더 많은 종을 보냅니다. 그런데 종들이 똑같은 행동을 합니다. 이제 주인이 그들이 자신의 아들만큼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서 보냈는데, 종들이 그 아들까지 죽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마 21:4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깊이 생각하십시오. 앞을 보면 넘어야 하는 산이지만, 하늘을 보면 지어진 산입니다. 내 삶에 찾아오는 고난을 보면서 유대인들처럼 율법을 기억하는 데서 멈추지 마십시오. 과학자들처럼 원인과 해결 방법을 탐구하는 데서 멈추지 마십시오.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엎드리십시오. 자연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멈추지 마십시오. 내가 지금 만지고 있는 핸드폰을 보면서도 그것의 주인을 기억하고 교회가 아닌 가정과 일터에서도 그것을 허락한 주인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우리가 사랑하는 복도 우리가 미워하는 고난도 그 주인이 동일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그의 집이 됩니다.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6절 후렴부)
첫째가 주인을 기억하고 깊이 생각하는 것이라면 둘째는 실패를 기억하고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마음을 완고하게 함으로 하나님을 거역했던 때를 예를 들어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 것을 충고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읽겠습니다. (7-9) 그들은 완고해진 마음으로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될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외에도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 것을 말하는 구절은 성경에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험은 완고한 마음, 즉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기 위해, 혹은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기 위한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왕정시대 이전에 이스라엘의 사사로 지냈던 기드온은 그의 고백처럼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미디안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용사로 사용할 작정이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확신을 하지 못해 하나님께 표징을 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번제물을 눈앞에서 태워버리며 기드온의 마음을 격려했습니다.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이스라엘 골짜기에 진을 쳤을 때도 그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고 거기에만 이슬이 있고 마당이 말라 있다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겠다고 하자 하나님께서 그 일을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다음날에는 한 번 더 하나님께 요청하여 이번에는 반대로 털만 마르고 바닥이 다 젖게 되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겠다고 하자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그의 뜻대로 행하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시험한 것이 죄가 되지 않는 것은 그 뒤에 일어난 일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을 위해 모인 3만 3천 명의 군사가 너무 많다며 하나님께서 집으로 돌려보내기 시작합니다. 3만 3천 명 중 3백 명만 남게 되었고 기드온은 그 3백 명의 군사로 전쟁을 나서 대승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을 시험했다는 표면적인 장면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의 중심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하고 그의 뜻을 행하기를 간절히 바랐던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백성 중 가장 약하고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지만,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믿음을 세워 진정한 용사 기드온으로 거듭났습니다. 이와 반대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완고한 마음, 즉 하나님을 미워하고 그를 저주하고 싶은 마음으로 그를 시험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계명을 받을 때, 그들은 금을 모아 불에 사르며 무엇이 자신들을 구원한 신이 누구인지 시험합니다. 성경에는 그것이 송아지 형상이라고 등장합니다. 금을 던졌는데, 송아지 모양처럼 생긴 것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환호하며 그것을 자신들의 주인 삼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송아지가 아닙니다. 만약 다리가 없이 나왔다면, 그들은 뱀이 나왔다며 섬겼을 것입니다. 만약 대칭되는 커다란 모양으로 나왔다면, 그들은 독수리가 나왔다며 섬겼을 것입니다. 어떠한 것이 나왔든 상관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구하는 모든 것들은 그 중심에 그를 향한 불만과 증오가 섞여있었고, 그들의 리더인 모세가 곁을 떠나면 언제든 하나님을 버릴 준비가 되어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기드온처럼, 그리고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들의 시험이 하나님을 발견하고 따르는 나름의 신앙생활이라는 사실을 비추어 볼 때, 오늘날 우리가 행하는 신앙생활 역시 그 표면적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중심이 어느 곳을 향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8-10 읽기)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중심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실 오늘 본문이 겉으로 보면 다시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 것을 말하는 것 같으나, 그러한 죄 속에서도 40년간 그들을 돌보고 훈계하며 용서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고로 한 때 우리의 죄를 기억하는 것은 동시에 그것을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떠올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실패가 귀합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실패는 지우고 싶은 악몽이지만, 하나님이 계시면, 실패는 오늘의 깊은 믿음을 만들고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는 추억이 됩니다. 그렇다고 추억을 많이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해서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