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진리 (요 1:9-13)

새해 복 만으로는 안돼

by Sue Park


[요1:9-13, 개역한글]

9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Jn 1:9-13, KJV]

9 That was the true Light, which lighteth every man that cometh into the world.

10 He was in the world, and the world was made by him, and the world knew him not.

11 He came unto his own, and his own received him not.

12 But as many as received him, to them gave he power to become the sons of God, even to them that believe on his name:

13 Which were born, not of blood, nor of the will of the flesh, nor of the will of man, but of God





각 사람을 비추는 참 빛

우리가 이 땅에서 겪는 가장 밝고 강한 빛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태양입니다. 태양이 없으면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얼어붙어 죽을 것입니다. 또한 태양이 없다면 세상은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 헤맬 것입니다. 밤에 은은하게 빛나는 달도 태양의 빛을 반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낮이나 밤 모두 우리는 어둠을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처럼 강하고 밝은 태양도 모두를 밝고 따뜻하게 만들어 주진 못합니다. 얼마전 저희 가족은 안성에 있는 천문과학관에 방문해서 달과 별을 관찰하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천문과학관 1층에는 태양이 계절별로 지구를 비추는 시간을 나타내는 모형이 있었는데, 자전하는 지구를 비추는 태양 빛을 자세히 보니, 빛을 받는 지구의 앞 부분 만큼이나 넓은 뒷 부분이 태양빛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아무리 강력한 빛을 뿜어내는 태양이라 할지라도 세상을 모두 밝히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9절은 하나님을 참빛이라 말합니다. (9절 읽기) 그 참빛은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입니다. 이 진리의 빛은 그림자를 만들지 않고, 놓지는 대상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하나님은 진리를 받을 만한 조건을 두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 자신이 이 땅에 오는걸 간절히 바라고 기다린 사람, 자신의 계명을 모두 지키고 항상 육신을 깨끗하게 한 사람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성품이 부족한 사람이든,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죄가 있는 사람이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방황하는 사람이든 하나님은 그들 모두에게 자신의 빛을 비추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누구도 자신이 빛을 받았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수고로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이 가진 것들이 자랑이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였고, 당대 선생들 중 선생인 가말리엘의 수제자인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흔히 말하는 금수저 중에서 금수저인 사람이 사도 바울이었고, 이러한 스펙은 모든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이러한 이력이 세상에 드러낼만한 자랑거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자신의 어떠한 죄인인지 깨닫게 되었고, 예수님 앞에 설 자격이 없는 자신에게조차 거부할 수 없는 강렬한 빛으로 모습을 드러내 사명을 주신 예수님께 완전히 엎드린 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이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태생적 신분과 자신의 노력으로 일군 학술적 이력이 자랑이 아니라 배설물로 보여지게 되었고, 오로지 자신과 같은 비루한 죄인을 친히 찾아와 빛의 길로 인도해 주신 예수님만이 자랑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마귀는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네가 자랑할 만한 위대한 일을 만들어 봐.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모습을 보여 줘.” 진리를 깨닫고 세상으로부터 참 자유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일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다시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어 하나님을 찬양할 마음이 없고 하나님께 기도할 시간이 없는 삶을 사는 불쌍한 자들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우리의 어떠한 모습을 보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신,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비추는 참 빛이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 은혜를 일생의 자랑거리로 삼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인을 알지 못하는 창조물

그러나 이처럼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이라 하더라도 그 빛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 빛을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는 예수님께서 부활 후 승천하기 전,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전달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예루살렘과 온 유대는 예수님과 그 소식으로 소동이 있던 지역입니다. 그곳에는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혼혈족들이 살아가는 사마리아에는 예수님을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땅 끝, 예루살렘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있는 나라들은 누구도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이 복음을 알지 못하는 곳까지 그들을 이끌어 자신의 증인이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진리의 참빛은 모든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지만, 그 빛을 전달하는 것은 그의 제자들의 사명인 것입니다. 바울은 사도행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행 10:13-15) 저는 말씀을 이어서 이렇게 완성하고 싶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없다면 어찌 보내심을 받으리요.” 즉, 우리에게 성령이 있으니 우리는 보내심을 받고, 말씀을 전파하는 자가 되어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듣게 하여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주의 이름을 시인하여 구원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빛을 깨닫지 못하는 첫번째 부류인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 있지 않은지, 혹시 있다면 그들이 복음을 믿을 틈을 얻도록 우리는 그들 곁에서 항상 기도하고 말씀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두번째 부류는 그 빛을 피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들어도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지 못해 복음의 진리에 발을 들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이러한 부류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사실 그들은 구약에 있는 모든 말씀을 철저하게 인수인계 받은 자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 누구보다 먼저 그를 환대했어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선지자들의 예언을 잘 알고 있었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 엄청난 수고와 노력을 기울인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그 누구보다 무시하고 배척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첫째는 그들의 기대가 무너지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들의 지위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던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바리새인들은 메시야의 구원이 이스라엘의 해방과 당연히 관련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통치의 왕이 아니라, 섬김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보는 유력한 자들을 찾아가다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쳐다도 보지 않는 죄인과 병자들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표적은 성전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으로 행해졌는데, 이것이 자신들이 지금가지 지켜온 율법에 반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눈 먼자가 앞을 보고,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심지어 죽은 자가 살아나는 역사가 눈 앞에 펼쳐져도 그들은 눈먼 장님처럼 그것 이면에 존재하는 메시야로서의 본질은 발견하지 못하고 오로지 예수님의 권위를 떨어뜨릴 고민에만 몰두했습니다. 이처럼 말씀이 있어도 나의 기대와 나의 지위에 대한 집착이 내 마음 한 곳에 꽈리를 틀면, 복음의 능력과 기적은 더 이상 내 삶에 어떠한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됩니다.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라.“(요 3:19)

그러므로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 관해서는 첫째, 우리가 성령을 힘입어 참빛인 그리스도 예수를 세상에 전하는 자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둘째, 말씀이 있어도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이 그 말씀의 모든 능력과 은혜를 빼앗는 원수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갔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하자, 니고데모는 늙은 사람이 어떻게 날 수 있는지를 물어보고 이어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는지를 물어봅니다. 니고데모 입장에서는 거듭난다, 즉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사람의 몸에서 나와야지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 말합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이 개념을 쉽게 말하기 위해 로마서와 갈리디아서에서 바울은 각각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았으며, ’아들의 명분’을 얻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즉, 거듭남은 우리의 육신을 다시 육신을 통해 이 땅에서 태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인 우리를 입양해 왕의 자녀라는 신분을 합법적으로 수여해 주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한가지 일은 반드시 끝을 내야 합니다. 우리에게 붙은 죄인이라는 신분은 법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가로막기 때문에 그 신분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이 우선되는 일입니다. 문제는 우리 스스로 이 죄의 짐을 질 수 없습니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바치고, 허락된 모든 시간을 헌신해도 우리가 가진 죄의 무게를 조금도 줄여낼 수 없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그 대가를 삶의 무엇으로도 치룰 수 없을 때, 그에게는 사형이 선고됩니다. 우리는 사형수로 자신의 이름표를 붙이고 사형집행일을 기다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와 죄가 없는 자신의 이름표를 떼 내 옷에 붙이고 내 옷에 붙어 있던 내 이름을 자신의 옷에 대신 붙였습니다. 이것이 법적으로 가능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죄가 없으며, 동시에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 대신 죽음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더해서 죄를 없애거나 줄이는 것이 아니라, 나 대신 내 이름표를 달고 죽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개인의 멸망과 구원은 각자의 모양과 삶의 방식이 아닌, 그들의 신분으로 결정됩니다. 이것이 바로 대속의 은혜요, 거듭남의 비밀입니다.


새해가 되어 우리는 복을 많이 받으라는 인사를 주고 받습니다. 서로의 복을 빌어주는 이러한 인사는 참으로 귀하고 좋은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우리가 삶에서 받은 가장 큰 복인 그리스도 예수를 기억하고 내 가족과 이웃과 더 나아가 원수에게까지 그 복을 빌어주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가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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