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의로운 자인가 (마 1:18-25)

율법에 순종하는 참다운 의미

by Sue Park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요셉은 마리아의 남편이자 예수님의 아버지 입니다. 아직 마리아와 결혼을 하지 않았을 때, 그는 자신의 약혼자 마리아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를 통해 먼저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잉태한 것이지만, 요셉은 천사로부터 소식을 듣기 전에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그녀와 동침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임신이 반드시 다른 남자와의 동침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 말합니다. 흔히 의롭다는 말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법을 잘 준수하는 사람을 말하므로, 이러한 수식어는 하나님께서 정한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으로 쉽게 추정됩니다. 약혼한 여자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임신하는 것은 그 당시 어떤 죄였을 까요?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동침하면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신 22:23-24). 자신의 약혼녀가 투석형에 이르는 잘못을 저질렀고, 그 잘못의 최대 피해자는 요셉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마리아를 고발하는 행위로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고 더 나아가 자신에게 커다란 정신적 피해를 안겨준 것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일을 조용히 처리하고자 합니다. 자신과 마리아가 약혼한 사실을 몰래 없애 그녀가 처벌을 받지 않도록 노력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질문을 해야합니다. 의롭다는 것은 무엇인가? 저는 오늘 이 본문 말씀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의로움에 대해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동안 가장 많은 비판을 받은 자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만약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로운 것이라면, 당시 가장 의로운 자들은 바리새인들이었는데, 왜 예수님은 이들을 그토록 자주 비판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율법을 가장 잘 지키는 사람 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이 율법으로 이루려 하신 목적, 즉 생명, 긍휼 그리고 사랑이라는 본질을 반복적으론 놓지거나 거스르는 방식으로 율법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외형상 정결, 금식, 십일조 같은 항목을 철저히 지켰으나, 예수님은 그들이 사람에게 보이려는 경건과 자기의 의에 사로잡혀 있다고 지적하십니다. 이처럼 거짓된 의로움은 율법의 본질보다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비본질적, 아니 악한 마음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온라인과 소셜 미디어의 발전으로 우리는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소식을 그 어느때보다 빠르게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빠르게 확인하고 판단하고 대응할 수 있게 해주기도 했으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향해 너무나 쉽게 돌팔매질 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기도 했습니다.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현상은 정의 실현이라기보다, 많은 경우 자기 의를 확인하려는 하나의 의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죄를 판결받지 않고 몇가지 의혹만 제기된 이야기에 마치 그가 유죄인 것처럼 댓글을 달고, 거기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을 그러한 죄를 공유하는 사람인 것인양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사실 확인보다 분노를 먼저 일으키고, 책임에서의 회복보다 사회적 퇴출과 매장을 원합니다. 의로움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이 다시 설 수 있는 길을 막아버리고, 심판의 쾌감에 젖어 자신은 저들과 다르다는 우월감에 빠지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한 유명한 가수가 유흥업소 단골이라는 소식이 한 유튜버를 통해 흘러들어왔습니다. 이 의혹으로 인해 그 가수는 막 결혼한 배우자와 파혼에 이르렀고, 모든 TV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몇년이 지나 이 모든 의혹이 거짓으로 드러났고, 그 의혹을 제기한 유튜버는 자신이 너무 과했다고 사과했습니다. 이 무서운 일이 과연 그 유튜버 한 명 때문일까요? 투석형은 한 사람이 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던지는 돌 하나로 사람이 죽을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유튜버가 전한 작은 의혹의 불씨에 기름을 붓고 그것이 마치 사실인양 주변 사람들에게 이를 퍼뜨린 수 많은 사람들이 결국 그 자리에서 함께 돌팔매질을 한 것입니다. 처음 시작된 의혹이라는 돌멩이 하나가, 그럴 수도 있다는 작은 말들이 모여 여론이 되었고, 결국 그것이 돌무덤이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이와 비슷한 일화가 등장합니다. 한 여인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녀를 끌고와서 예수님께 이렇게 물어봅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 8:5) 이 여인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간음이라는 죄의 특성상 그 죄를 현장에서 목격한 사람은 한 사람, 많아야 두 사람정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을 잡아 예수님까지 가면서 그 한 두명이 무리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자리에 모인 모든 군중들의 중심을 알고 허리를 굽혀 땅에 무언가를 적으셨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리 치라는 말씀을 들은 무리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모두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용서하긴 하셨지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을 통해 그 여인의 죄가 결코 가벼운 죄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 자리에서 하신 일은 군중에게 정죄의 자격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에게 부끄러운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중들 앞에 자신의 의를 과시하기 위해 돌을 드는 그릇된 중심을 지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만든 것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리기 위한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과거 율법은 죄를 지은 자들이 심판을 받고 죽음에 이르는 것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보여주었습니다. 때로는 회개할 기회가 있기도 했으나, 때로는 즉각적인 심판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만 보면 하나님은 죄인을 가혹하게 처벌하시는 분처럼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형벌은 죽이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수술이라는 이었습니다. 언약 공동체 이스라엘은 한 개인의 죄가 개인의 문제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죄가 공동체 안에 머물러 자라면, 결국 하나님과의 언약을 무너뜨리고 공동체 전체를 붕괴시키는 방향으로 확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는 표현을 반복하시며 죄를 방치하지 말고, 끊어내며, 멈추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벌은 ‘처벌’이 아니라, ‘수술’에 가까운 것입니다. 암이 무서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전이성 때문입니다. 초기에 잘라내면 문제가 없는데, 시간이 지나 대처가 늦으면 온 몸으로 퍼져 더 이상 수술을 진행 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죄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의 작은 균열로 시작되지만, 그 균열이 방치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은 성품이 되어 결국 관계와 공동체를 잠식해 들어가는 암적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를 대충 넘어가지 않고 끝까지 추궁하고 찾아 제한하셨습니다. 바로 이 죄의 확산성을 예수님은 이러한 죄의 속성을 누룩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누룩은 겉으로 보기에 손가락 끝만 한 조각처럼 작아서 밀가루 반죽 속에 들어가면 어디 있는지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룩이 가진 힘은 그 자체의 부피가 아니라, 그것의 전파력에 있습니다. 그 작은 누룩이 반죽 전체에 스며들어 그 거대한 밀가루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를 잘라내는 것은 개인을 죽이기 위한 하나님의 형벌이 아니라, 공동체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처절한 수술 과정인 것이며, 이것은 ’분노’가 아니라, ’사랑’이 그 배경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으로 다시 돌아와 의롭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첫째, 사랑을 바탕으로하는 의로움입니다. 성경은 율법의 중심을 사랑이라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며, 바울은 사랑이 곧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의로움의 형태는 남아 있으나 사랑이 빠진다면 그것은 어떤 형태일까요? 그러한 의는 겉보기에 죄를 미워하는 것 같으나, 사실은 사람을 미워하는 곳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없이 행위만 남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이라 책망하신 것이고, “나는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반면 사랑을 바탕으로 한 의는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를 굴복시키거나 공동체에서 제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회복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바로 본문의 요셉이 그랬습니다. 그는 진실을 다 알지 못했지만, 사랑의 방향으로 행했고,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끊고자 했던 선택은 율법으로부터 멀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의 본질인 사랑이라는 심장에 더 가까이 다가간 것이었습니다. 의롭다는 것의 두번째 의미는, 사람을 살리는 방향성을 가진 의로움입니다. 에스겔 18:21-23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행한 공의로 살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 18:21-13) 예수님 역시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율법이 존재하는 이유가 사람을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람의 생명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향해 돌을 들지 못하게 하신 것은 그녀에게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정의라는 이름으로 돌을 들고 한 사람을 매장하려는 본질과 어긋난 그들의 중심이 예수님이 볼 때 그 여인의 죄 만큼이나 심각한 죄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참된 의는 사람을 죽이는 결론으로 달려가지 않고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달려갑니다. 의롭다는 것의 마지막 세번째 의미는, 죄를 끊어내는 의로움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사람을 살린다는 말이 죄를 가볍게 본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이 있는 사람일 수록 죄를 더 심각하게 봅니다. 그것이 결국 몸에 퍼지는 암세포가 되어 그 사람을 죽이게 될 날이 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돌을 내려두고 자리를 떠냈을 때, 예수님은 간음한 죄를 저지른 여인에게 “괜찮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인도하시되, 죄는 그대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은 살리지만 죄는 끊는 것, 이것이 성경적 의로움의 정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있는 그대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중심에 합한 의로움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율법 중심의 삶이 수 많은 사람들을 죽여 돌무덤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말씀대로 산다고 말하면서 중심에 사랑이 없다면,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과 우리 육신에서 나오는 모든 행위는 마치 회칠한 무덤처럼, 겉 보기에는 그럴듯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지만, 그 안에는 시체가 들어있는 죽은 것에 불과합니다. 왜 하나님은 요셉과 마리아에게 동시에 잉태사실을 알리지 않았을까요? 저는 그 이유가 하나님께서 요셉의 의로움을 세상에 드러내고자 하는 섭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리아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잉태된다는 믿음을, 요셉에게는 율법에 순종하는 참다운 의미의 의로움을 나타내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을까요? 오늘 하나님은 마리아가 세상에 보여준 믿음 만큼이나 요셉이 세상에 보여준 참된 의로움을 우리에게 원하십니다. 혹시 나의 의로움으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누군가의 삶을 무너뜨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 마음이 있다면, 그 죄를 회개하십시오. 요셉이 사랑과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그 중심으로 문자로 이루어진 율법의 한계를 넘어선 것 처럼, 우리도 그러한 놀라운 율법의 정수를 깨달아 삶에서 행할 수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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