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칙을 지키느라 정작 중요한 사랑을 잊고 살진 않습니까?
십계명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개인의 도덕 훈련 목록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만 성립되는 계명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고,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타인의 존재를 전제로 합니다. 다시 말해, 율법은 혼자 지킬 수 있도록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없는 사람은 부모를 공경할 수 없고, 이웃이 없는 사람 역시 자신이 이웃에게 행해야 할 계명을 지킬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본질인 사랑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는데, 결국 이러한 사랑이 성취되어지기 위해선 나 혼자가 아니라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일 때만 완성됩니다. 그래서 율법은 처음부터 우리를 완전한 존재로 만들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타인과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지를 드러내는 거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뛰어난 요리 실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음식 재료를 만나지 못한다면 그는 그저 평범한 사람에 불가합니다. 어떤 사람이 뛰어난 수영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물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역시 그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이웃에게 율법을 행할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정작 이웃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역시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원리와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먼저 배에 태워 맞은편으로 보내셨을 때, 많은 강풍으로 배가 뒤집힐 위기에 처했습니다. 엎친데덮친격으로 저 앞에 유령으로 추정되는 사람 형상이 물 위에 떠있습니다. 정신적, 육신적 충격이 다다랐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자 자신을 불러 오라 말씀해 달라 말합니다. 이런 상황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짙은 어둠 속, 자신들을 삼키려 요동치는 물로 부터 생존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던 자가 이제 그 물로 자신의 발을 디뎌야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베드로는 어부 출신으로 그 누구보다 그러한 물에 빠진 자가 결코 살아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믿음으로 그 물에 발을 디딘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우리의 경험을 뒤로하고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할지도 모르는 갈림길에서 그것의 쓰임을 증명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믿음이 참 좋다”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그가 말씀에 대한 지식이 뛰어나거나, 혹은 그가 교회에서 특정한 직책을 맡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가 일생 가운데 가장 중요하거나 위험한 순간에 말씀을 의지한 경험이 있는 것을 증명하는 수식어 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믿음은 소유하고 있는 그 자체만으로는 어떠한 의미도 갖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에게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 당할 때, 두번째 시험은 이것이었습니다.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마 4:5-6) 이 시험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7) 얼핏 보면 베드로의 상황과 비슷해 보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말씀에 의지하여 성전 꼭대기에서 발을 떼는 것과 베드로가 배에서 발을 떼는 것은 겉으로 보면 매우 비슷해 보이지만, 두 사건의 본질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에게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한 믿음의 행위였지만, 예수님이 성전 꼭대기에서 발을 떼는 행위는 말씀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검증이었습니다. 즉, 베드로는 자신의 행위로 세상에 믿음이라는 도전과 교훈을 주었지만, 예수님이 성전 꼭대기에서 발을 떼는 행위는 얼핏 믿음의 시험 같으나, 실상은 누구에게도 도전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시험하는 악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 도전을 주지 못하는 믿음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도구밖에 되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믿음을 구한다는 것은, 내가 의지하고 있는 배에서 발을 떼고 나를 잡아 삼키려는 물을 향해 발을 딛는 경험을 마주하겠다는 다짐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율법을 묵상하는 것은 단순히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보다 더 전진하겠다는 다짐이며, 행함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이 우리를 통해 드러나길 바라는 간절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이 처럼 세상에서 하나님께 쓰임받는 좋은 일꾼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좋은 요리사가 재료를 만났을 때 본격적으로 도구를 준비하는 것 처럼, 능력있는 수영 선수가 물을 만났을 때 본격적으로 몸을 푸는 것 처럼, 마찬가지로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을 만났을 때 본격적으로 말씀을 행할 다짐을 합니다.
그런데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율법의 표현을 보면, 대부분이 “하지 말라”는 형식으로 주어집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이것은 최소한의 선을 지키기 위한 수동적 명령입니다. 다시 말해, 이웃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라는 요구라기 보다는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는 경계선에 더 가깝습니다. 율법은 죄를 막는 데에는 유효했지만, 사랑을 완성하는 데까지는 우리를 데려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노력해 지키는 사람은 “나는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있었지만, “나는 사랑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물론, 율법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의 본질인 사랑을 빼고 율법으로만 자신이 모든 것을 행했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저는 좋아하는 영화가 개봉하는 소식이 들려오면, 계속해서 그 영화의 예고편을 봅니다. 그것은 그 영화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등장인물이 나오는지, 그리고 배경과 분위기는 어떤지 보여주며 본편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줍니다. 그러나 아무리 다양한 예고편을 보더라도 절대 본편이 어떤 내용으로 결말을 내리는지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즉, 예고편은 본편을 더 보고싶게 만드는 도구이지, 그것이 본편의 대체제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모세에게 준 율법은 그 당시 이스라엘에게 단편적으로 필요한 핵심적 율법으로, 일종의 율법의 예고편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신 뒤, 드디어 그 모든 예고편의 중심을 이끄는 결말을 드러내셨고,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완벽한 본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예고편에서 사랑이라는 주인공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예고편을 맞춰보면 결국 하나의 그림자인 것을 알 수 있고, 본편에 가서야 그 주인공인 사랑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러한 예고편을 본편인 줄 착각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그 누구보다 율법을 지키는 데 진심이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말씀이 정해 둔 선을 넘지 않는 데에는 철저했지만, 그 선을 넘어 사랑하는 데에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사람을 살리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간음한 여인을 향해 돌을 드는 것은 당연하게 여겼지만, 그 영혼을 사랑함으로 가엾이 여기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반면 자신의 아내가 결혼 전 임신하여 간음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했던 요셉은 오히려 그 아내 마리아를 살리는 선택을 함으로써 의로운 자라는 칭함을 받지 않았습니까? 저는 자녀가 넷이라 집에서 지켜야 할 규칙이 많습니다. 예를들어 아이스크림은 하루에 하나씩만 먹을 수 있는 규칙이 있습니다. 이러한 규칙이 없으면 아이들은 항상 싸웁니다. “언니는 아이스크림 두개 먹었으니까 나도 두개 먹을래요.” 같은 주장을 합니다. 이것은 이러한 최소한의 마찰을 막기 위해 정해둔 규칙이지, 반드시 하루에 아이스크림을 하나 먹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본질은 건강의 문제인 것입니다. 부모가 이러한 규칙을 정해 두었다 하더라도 이러한 중심을 이해하고 야채를 많이 먹거나 과자를 먹지 않는 아이는 사실 아이스크림을 하나 먹으라는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보고 싶은 자녀의 모습은 이처럼 건강 문제라는 핵심을 깨닫고 자신을 절제하는 모습이지, 하루에 아이스크림 하나만 먹었다고 자랑하는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을 가르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이 말씀은 행위를 더 많이 하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율법을 더 철저히 지키라는 말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수동적인 순종에 머물러 있는 신앙에 대한 경고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자신은 오늘 아이스크림을 하나만 먹었다고 자랑하는 자들과 같습니다. 그들이 왜 아이스크림을 두개 이상 먹어야 되는지는 알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은 시선이 아이스크림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건강이라는 본질을 위해 훨씬 더 많은 율법을 스스로 만들고 이루어 결국 서시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지닌 자들입니다. 원수를 미워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까? 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원수를 사랑하는 데 까지 나아가십시오.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까? 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웃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것으로 나아가십시오. 신앙은 수동적으로 죄를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사랑을 행하는 것임을 기억하여 의문으로 된 율법을 넘어, 사랑으로 완성된 율법으로 그 신앙의 지경을 넓혀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