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 시대를 살아가는 워킹맘, 다자녀 엄마의 변
나는 작은 교습소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교습소를 계속 운영할 수 있을지 요즘 의문이 든다.
나야 일을 해서 계속 아이들을 보내고 고작 3주를 쉬었지만, 계속해서 집에서 아이들 보육하는 엄마들의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 일지 상상 조차 힘들다. 거의 한 달을 쉬었으니 몸이 가뿐해야 할 텐데 나는 언제까지 거리두기가 계속될지 불안하고 두려움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의도하지 않은 쉼은 쉼이 아니다. 회사 다니는 사람들은 무급으로 쉬면 돌 봄비용이 나온다고 한다. 자영업자나 프리랜서들은 정부 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정부는 그들을 위해 지원을 한다고 하지만 이것저것 따져보면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가까지 지내는 이웃 중에 공예작가님이 있다. 저번 지원에서도 받지 못했다. 전시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작업을 증명할 수 없어서였지만 현실은 꾸준히 작업을 계속해오시는 분이 셨다. 사실 교습소는 방역수칙을 지키는 선에서 운영을 가능하다는 정부지침이 있었지만 (집합 제한) 오픈한 사람들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지는 의문이다. 운영 중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원을 떠나서 자영업자들은 힘이 든다. 그리고 자영업자이자 엄마이기도 한 사람들은 더 힘이 든다. 그보다 더 힘든 사람은 물론 지금을 살아가는 모든 엄마들일 것이다. 3주간 쉬면서 4명을 자녀들을 집에서 돌봤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른 채 아이들과 지지고 싸우고 볶고 하는 동안 나도 돌 봄비용이라도 조금 받았다면 위로가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의 생활비를 내가 충당하고 있었는데 버는 돈이 없어지니 남편도 일이 어려워졌다. 아이들이 집에 있으니 식자재는 더 많이 들었다. 먹이고 입히고 놀리고 재우고 하면 나를 위한 시간은 거짓말을 안 보태고 1도 없어졌다. 너무 피곤해서 쓰러지듯 잠이 들면 다시 아침이 되었다. 나를 위한 글쓰기, 그림, 책 읽기, 연구, 모두 정지 상태가 되었다.
원망스런 마음이 들었다. 어린이집에 보내지 못하는 것도, 일을 하지 못하는 것도,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것도, 누군가나 더 큰 존재에게 불평을 하고 싶어 졌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것을 알지만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어 지는 그런 마음이다. 정답은 알지만 사실은 처참하다. 쉽게 화가 나고 쉽게 큰소리를 치게 되는 나를 발견한다. 말처럼 글처럼 되는 게 육아라면 얼마나 좋을까. 한 명이라도 없었으면 하는 생각을 안 했다면 거짓말이다. 그만큼 네 명이 같이 있다는 것이 부담이 되었다. 만약 내가 두 명의 자녀만 아니 세명만 있었다면 잔인한 생각을 계속했다. 물론 배 아파서 낳은 자식들이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평일이 없고 주말만 계속 되는 것 같았다.
이렇게 매일을 지냈다. 징징거릴 시간도 없이 아이들의 존재를 운운하며, 잘난 나의 일상이 무너진다고 그립고 원망스럽다 투덜거리면서, 겉으론 티를 내진 않았지만 나의 속은 하루하루가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아이들은 3주동안 부족한 엄마에게 엄마랑 오래 있어서 좋다. 다시 어린이집 가기 싫다며 무한한 사랑을 표현해주었다. 고맙고 과분한 선물들이다. 매일밤 큰소리 치지 않기로 다짐하며 쓰러지듯 잠이들고 다시 하루가 오면 그 다짐은 항상 실패한다. 종종 문안하게 흘러간 하루에 감사하게 된다.
거리두기가 2.5단계에서 2단계로 하향되면서 나는 바로 다시 일을 시작했다. 한타임에 한두명 학생들도 열명이 채 안되지만. 그래도 일을 하면서 한푼이라도 더 벌어야 하는 상황이기도 했지만 나아가 한주라도 더 쉬게 된다면 코로나로 죽든 정신병으로 죽든, 병든 나의 정신의 화살이 아이들에게로 향할것만 같았다.
모든 엄마에게 그런 휴가를 줬으면 좋겠다. 오롯이 혼자가 되는 휴가. 엄마휴식법 이런 거 누가 안만들어 주나. 코로나로 지친 모든 엄마에게 위로한다. 당신과 같은 내가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