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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다 Jun 11. 2023

발칸반도 코소보와 한반도 독도

유럽의 화약고 발칸반도에서 십수 년간 이어진 영유권 분쟁

테니스 선수 Novak Djokovic가 5월 31일 프랑스 오픈 테니스 대회에서 '코소보는 세르비아의 심장이다! 폭력을 멈춰라'는 문구를 카메라 렌즈에 적었다. / 사진=BBC


5월 31일, 프랑스 오픈 테니스 대회에서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이자 유니클로 공식 홍보모델로서 활발하게 활동해 온 노박 조코비치(Novak Djokovic)가 한 선수를 상대로 1승을 거둔 후 대회 공식 촬영팀 카메라 렌즈에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해 화제가 되었습니다.


노박 조코비치의 조국 세르비아는 어떤 나라?

세르비아 국기를 들고 포즈를 취하는 노박 조코비치. / 사진=BBC

그는 동유럽 발칸반도에 위치하여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던 연방의 일원이었던 세르비아의 국적을 가진 테니스 선수입니다. 과거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요시프 티토(Josip Broz Tito)라는 카리스마적 리더를 통해 총 여섯 개의 나라가 하나의 연방을 이루는 형태로 국가가 운영되었습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대외적인 경제, 외교정책으로는 티토의 전략에 따라 추진되며 나름 성공적인 가도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연방 구성원들의 불만 또한 제기되었으나 수면 위에 적극적으로 떠오르진 못 했죠. 이때 연방을 구성한 국가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현 북마케도니아)였는데 당시 연방 구성원 명단에는 코소보가 없었습니다.

세르비아 외무부에서 공개한 1999년 나토의 베오그라드 폭격 당시 사상자 등 수치를 설명하는 영상. / 영상=세르비아 외무부

그런데 요시프 티토가 87세이던 1980년 5월 건강 악화로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세르비아계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집권하게 되는데 이때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를 제외한 다른 나라에 대한 차별적인 스탠스를 보이고 이를 세르비아 중심 민족주의 정책과 함께 제노사이드(대량학살)를 저지르면서 훗날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여러 나라로 찢어지는 분리독립과 함께 씻을 수 없는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아픔을 안겨다 줍니다. 유고 내전이 종식되는 결정적인 계기로는 국제사회의 내전 개입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의 무력을 적극 활용한 개입으로, 베오그라드는 수천번의 비행 공습을 당했습니다.

*이 중 베오그라드 내 있는 중국대사관 건물 역시 나토 공습의 타깃이 되었습니다. 공습 당시 거의 유일한 재외공관 공습 타깃 중 하나였습니다.


세르비아인 노박 조코비치로부터 코소보 얘기는 왜 나온 걸까?

나토 소속 라트비아군이 코소보와 세르비아의 경계가 맞닿은 지역에서 트럭을 검문하고 있는 모습. / 사진=BBC

코소보는 유고 내전 전까지만 해도 연방의 자치주 법 덕분에 자치 정부로서 연방의 통제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자치주 성격을 갖고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이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리더였던 요시프 티토가 연방 내부를 잘 결속하고 이끌어나가기 위해 "brotherhood and unity of our peoples(형제애와 국민통합)"이라는 메시지를 재차 강조해 왔고, 그러한 연방 통합정책의 일환으로 자치주 제도가 도입되면서 알바니아계 사람들이 코소보 인구 비율을 가장 많이 차지했던 코소보 역시 자치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현재도 세르비아는 당시 코소보와 함께 자치주 지위를 갖고 있던 보이보디나 자치주와 함께 코소보를 세르비아의 자치주로 인식하는 것이 공식적인 입장입니다.

1939년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세르비아-보스니아 연합군 사이 치열하게 벌어졌던 코소보 전투의 모습. / 그림=Wikimedia Commons

 아무튼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발발하여 전쟁의 피바람이 불 당시, 연방 구성원들의 분리독립 요구가 빗발치는 가운데 코소보 자치주는 주민의 대다수가 알바니아계였습니다. 반면 세르비아계 코소보 주민은 소수였던 점을 들어 코소보가 세르비아, 혹은 유고 연방으로부터 분리독립되길 원한다는 의사를 코소보 내 주민투표를 통해 전달하고 자체적으로 코소보의 독립을 선언합니다. 그런데 세르비아 입장에서는 코소보라는 지역에서 독립을 원한다고 그냥 독립을 승인해 줄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세르비아 왕국 당시 오스만튀르크 제국에 맞서 항거했던 일명 '코소보 전투'의 역사가 담긴 의미 깊은 지역이 바로 코소보인 것이죠. 오래된 역사이지만 여전히 세르비아인들에게는 성지처럼 여겨지는 곳이 바로 코소보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세르비아가 지금까지도 공식적인 국가로서 인정을 하지 않은 곳입니다. 남북한이 서로를 일종의 괴뢰정권 취급하는 것처럼, 세르비아 역시 코소보를 괴뢰정권으로 보는 인식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코소보를 방문했던 외국인도 여권에 코소보 정부의 출입국 승인 도장이 찍혀있는 채로 세르비아로 직접 입국하려면 세르비아 정부로부터 입국 거부를 받는, 매우 독특하면서 동시에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발칸반도의 코소보 문제는 한반도 독도 문제의 자화상일까

그렇다면 발칸반도 벌어지는 이 코소보를 둘러싼 분쟁은 해결될 기미가 보일까요. 근데 이 코소보 분쟁이, 그리고 이 분쟁과 관련해 자국민 중 유명인이 목소리를 내는 것이 대한민국 사람 눈에 크게 낯설어 보이진 않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일본에 의해 강제병합되는 등 민족적 고초를 겪음과 동시에 독도의 영토권도 당시 일본에 빼앗겼었죠. 이러한 일본의 자국영토를 강제점유하는 현상이 1945년 식민지 조선이 해방된 이후부터 현재까지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로 남아있죠.

박종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선수가 '독도는 우리땅'이라 쓰여있는 피켓을 들고 공개적인 활동을 해 이와 관련한 찬반여론이 뜨거웠다. / 사진=OSEN

그래서인지 한국인의 눈에는 독도 갖고 영유권 주장을 하는 일본이 미워 보이기 십상입니다. 한국의 유명인들 사이에서도 독도문제는 인기 주제입니다. 어떤 이들은 독도문제를 갖고 공개적인 목소리를 내서 국민의 지지를 받기도 하고, 독도 여론을 한순간 뜨겁게 가열하기도 합니다. 박종우라는 유명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역시 2021년 런던올림픽 일본과의 3,4위전에서 승리한 뒤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그라운드를 질주해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이 일을 통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따낸 동메달을 IOC(국제올림픽위원회)가 박탈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온 적이 있죠.


발칸과 한반도 모두 양자 간 대화 절실, 프랑스-독일의 협치 사례를 본받아야

분쟁으로 끙끙 앓고 있는 발칸반도와 한반도, 각각 분쟁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결국 대화가 절실해 보입니다. 각 나라의 선량한 국민들이 국가 대 국가의 이해관계 충돌, 혹은 정치인들의 계산된 이념논리 하에 지속되는 분쟁에 피로해지기도, 때로는 직간접적인 피해를 받는 희생양이 되기도 합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서로의 입장이 되어보면서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적극적인 수준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프랑스-독일의 협치 사례는 어떨지 함께 생각해 보는 것을 제안해 봅니다.

2000년대 들어서 유럽석탄철강공동체의 역할과 기능이 완전히 유명무실해져버렸고, 2002년부터는 본 공동체의 깃발이 게양조차 되지 않았다. / 사진=BBC

1951년 파리 조약으로 군수산업에 주요하게 쓰이던 원료인 철강과 석탄의 수요와 공급을 공동시장(common market)에 맡기는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가 발족되었는데 당시 주요 참여국가는 프랑스와 독일이었습니다. 당시 독일은 세계대전을 일으킨 주범으로서 막대한 보상금을 지불함과 동시,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킬지 몰라 전 세계 강대국들이 감시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에 독일 역시 나름대로 국제적인 수준의 신뢰와 위상을 회복하고자 유럽석탄철강공동체 활동에 베팅했고, 이후 이 조직은 유럽공동체로 발전하고 훗날 유럽연합의 모태가 됩니다.

2006년 프랑스-독일 공동 역사교과서 발간을 기념하며 두 나라 관계자가 사진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사진=BBC

유럽통합의 산실이 되었던 유럽석탄철강공동체의 주역인 프랑스와 독일은 이후에도 다양한 형태의 협치 노력을 이어갔는데, 대표적이 사례 중 하나가 바로 공동 역사 교과서 발간입니다.  두 나라뿐만 아니라 어느 상이한 국가들이라도 서로 다른 역사관을 갖고 같은 사건이나 소재도 다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국가의 공식적인 역사적 인식은 곧 국익과 직결되는 민감한 사안으로 발전할 수 있어 일말의 가능성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프랑스와 독일은 그런 리스크도 감수하고 양국이 함께 좀 더 진정성 있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기어코 2006년에는 프랑스와 독일 양국이 공동으로 저술한 역사교과서를 발간하기에 이릅니다. 이처럼 두 나라가 협치와 대화를 통해 서로 시너지를 내고 양국 간 평화와 협력을 도모하는 모습은 우리 한반도와 먼 땅에 위치한 발칸반도에 시사하는 점도 크다고 봅니다. 결국 이러한 프랑스-독일 협치 사례부터 다양한 여타 케이스들의 장단점을 뽑아내어 나름대로 각 상황에 맞게 적용해야 바람직할 것 같습니다.

 

본 게시글은 유튜브 ‘슈카월드’의 <‘유럽의 화약고’ 발칸반도를 뜨겁게 달군 메시지>로부터 영감을 얻어 작성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콘텐츠의 주된 내용은 작가 본인의 사전 배경지식 및 리서치 내용을 토대로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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