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보리(나) - 전생의 기억을 가진 채 태어난 아이
삼신 - ‘나’를 이 씨네 첫째 딸로 점진해준 신
산모 - ‘나’의 엄마
아빠 - ‘나’의 아빠
의사 – 산모의 출산을 돕는 의사
무대 위에 안개가 깔리며 ‘나’는 꿈속을 헤매고 있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삼신 -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로) 이번엔 ‘보리’ 차례구나. 어디 보자...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리며) 물야의 산골 마을, 김 씨네 집 마당 개로 살며 살아생전 큰 화재에서 주인의 목숨을 구한 기특한 아이로고. (안타깝지만 기특하다는 듯) 술에 취해 산불이 났는지도 모른 채 곯아떨어진 네 주인을 대신해 털에 물을 적셔 불바다를 뒹굴었구나. 살이 타는 고통을 겪고 이곳 저승에 왔으니 그 여정이 얼마나 고되었느냐. 한낱 축생으로 태어났지만 마음 씀씀이와 됨됨이가 참으로 기특한지고... (종이 위에 글 쓰는 소리를 내며) 내 너를 이번엔 대한민국 서울의 이 씨네 집 맏딸로 점지해 주겠다. 전생에 알알이 쌓은 공덕으로 금생에는 실한 인간으로 태어나 사랑받으며 크거라.
삼신의 목소리가 줄어들고 잔잔한 멜로디가 깔리며 안개가 옅어진다. 흩어지는 안개 사이로 길이 드러난다. 길 끝에는 환한 조명이 밝혀져 있다. ‘나’는 그 빛을 따라 걸어간다. ‘나’가 무대에서 사라지며 세팅이 병원으로 바뀐다.
의사 – (땀을 흘리며, 목소리에 힘을 주며, 급박한 듯) 산모님, 이제 거의 다 됐습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힘을 주세요!
산모 –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찡그리며) 끄윽!
산모가 마지막 힘을 주자. ‘나’가 신생아의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난다.
나 - (관객에게만 들리는 음성) 엄마, 나 꿈을 꿨어요. 꿈에서 삼신할머니를 만났어요. 내 이름은 ‘보리’고, 강아지였데요. 그런데 내가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이번엔 엄마의 첫 딸로 점지해 주신 거래요. 엄마도 꿈에서 삼신할머니를 만났나요? 제가 엄마 딸이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엄마도 기뻤나요? 저는 엄마 딸이 된다는 소리에 뛸 듯이 기뻤어요. 엄마를 하루라도 빨리 만나고 싶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요. 엄마 나를 낳느라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감사하고 사랑해요.
‘나’는 많은 말을 쏟아 내었지만 무대 위에 울려 퍼지는 음성은 '응애응애' 뿐이다.
아빠 – (감격스러운 듯 울먹이며) 여보, 정말 수고 많았어. 우리 첫 딸, 보리야. 자기를 많이 닮았어. 한 번 봐봐.
아빠가 조심스럽게 포대기에 싸인 '나'를 산모에게 건넨다. 산모는 기진맥진하지만 사랑스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산모가 나지막이 '내 딸... 보리...'를 읊조리면 서서히 조명이 흐려진다. 암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