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을 전하다
에세이 연습 과제 2 - 어려운 문제를 마주했을 때 해결책을 제시해 준
2주 동안의 입원 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혼자 살던 자취방에 들어서니 고독하고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퇴원 전 마지막 상담에서 의사와 나누었던 말을 떠올리며 주섬주섬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가족과 같이 사시나요?”
“아니요. 혼자 살아요.”
“그래요... 음... 선생님 자살 충동성 점수가 조금 높게 나와서 우려되는 부분이 있어요. 당분간만이라도 가족들과 같이 지내시면 어떨까요?”
“제 본가에서 직장까지 출퇴근이 힘들어서 가능할지 모르겠어요.”
“선생님들은 병가를 며칠까지 쓸 수 있나요?”
“병가는 60일까지고 그 이후엔 병휴직으로 들어가요.”
“그럼, 일단 병가를 두 달 내고 가족과 함께 살면서 선생님 몸과 마음을 돌보는 건 어때요?”
“병가를 연장하려면 교장선생님을 다시 만나야 하는데, 그건 생각만으로도 너무 두려운데요...”
“그렇게 한 번 대면하는 것도 두려울 정도인데 계속 보면서 일하는 건 더 힘들지 않겠어요?”
“아...”
“앞으로 이 말만 명심하세요. ‘힘들면 쉬자.’”
신기한 경험이었다. 첫 발령받은 해부터 십 년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담임 직을 맡으며 일하는 동안 그 누구도 나에게 쉼을 권하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담임이 아이들 엄마나 다름없으니까 내 아이다 하는 마음으로 보살펴야지. 보호자가 시간이 없다고 하면, 이 선생님이 보호자 역할을 대신하는 게 맞아. 병원도 데리고 가고, 집에도 태워주고 그래야지.’
‘야간 특강을 이 선생님이 맡아줬으면 합니다. 밤 9시부터 11시까지 두 시간씩 진행되는 토익 반 운영 기안을 오늘까지 올리세요.’
‘와, 이 쌤, 방과 후 수업을 그렇게 많이 하면 금방 부자 되겠다. 한창 젊을 때 고등학교에서 열심히 돈 버는 게 맞지, 뭐. 돈 버는 기회니까 힘내!’
‘더, 더, 힘내서 열심히!’를 종용하던 세간의 말속에서 발군한 쉬라는 한 마디는 마치 존시에게 생명과 재기를 상징했던 마지막 잎새 같았다. 나는 의사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 내게 남은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기 전 유리 덮개를 씌우기로 결심한 것이다. 나의 애처로운 마지막 잎새를 보호하기 위해 의사가 권한 방법은 보통의 사람에게는 아주 쉬운 것이었다. 부모님과 같이 살면서 최대한 많은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
커다란 짐 가방을 들쳐 메고 본가로 들어온 날 마주친 엄마의 눈동자가 서글퍼 보였다. 멀리서 열심히 일하며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영근 딸이라고만 생각했을 엄마였다. 우울증과 불안장애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엄마에게도 서글픈 상처를 안긴 셈이 됐다. 엄마는 그 서글픈 눈으로 애써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앞으로 남은 치료만 생각하자며 등을 토닥이는 엄마의 손이 덜덜 떨렸다.
일주일 동안 엄마가 해준 성대한 집 밥으로 보신하며 잘 먹고 잘 자는데 힘썼다. 규칙적으로 먹고 자는 것만 제대로 해도 한결 몸이 가뿐해진 느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템플스테이를 제안했다. 산 좋고 물 좋기로 소문난 천년 고찰에서 며칠 머물다 오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엄마와 나는 의성 고운사로 둘만의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일주일을 사찰에서 지내며 매일 새벽을 반야심경 독송과 백팔 배로 열었다. 생각보다 몸이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상념을 비워내니 한결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백팔 배를 하는 내 옆에는 항상 고행을 같이하는 도반, 우리 엄마가 있었다. 엄마는 노구의 연약한 무릎이 땅 위에 일백 여덟 번 스러져 가는 내내 저를 비우고 자식의 안녕만을 기원했을 것이다.
템플스테이의 마지막 밤, 숙소 안에는 밤의 고요함과 희붐한 달빛, 그리고 곤히 주무시던 엄마의 고운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밤과 새벽 사이를 줄다리기하던 시간의 서정을 빌려 엄마에게 진심 어린 마음을 전했다.
내가 우울의 끝에서 나 자신을 저버리지 않게 지탱해주어서 감사하고 사랑한다고.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가 용기 입은 나지막한 속삭임의 사이사이를 메웠다. 내 불안한 마음조차 잠시 제 자리를 잃었던 오랜만에 맞은 평온한 한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