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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 Nov 04. 2022

상상을 처방합니다

에세이 연습 5 - 내가 꿈꾸는 만남, 내가 생각하는 인연의 조건

건조하고 후텁한 히터 바람이 머리 위에서 불어온다. 가뭄에 쩍쩍 갈라진 논바닥인 듯 감정이 메마른 내 마음속에도 돌 바람이 인다. 문득 손끝에 툭하고 걸리는 우울과 쓸쓸함이 거울처럼 나를 반영한다. 반질반질한 감정의 표면 위에 애써 웃음을 쥐어 짜내고 있는 나의 외면이 나타난다. 불쌍하다. 안쓰럽다. 먼저 헤어짐을 고하고도 낡은 인연의 끈이 계속 이어지기를 갈망하던 구차하고 구슬픈 이별의 순간, 그때도 이토록 후텁한 공기가 흘렀던가?


어느새 까슬까슬해지고만 나의 연애 세포에게 상상을 처방한다. 눈을 감고 검은 무대를 불러내 그 위에 우연하고 아름다운 만남을 꿈꾸는 ‘나’라는 주인공을 세운다. 배경은 유펜의 중앙 도서관, 소설책이 즐비한 문학 서가 앞이다.


‘나’가 혼잣말을 내뱉는다. “여기 어디쯤 있을 텐데...” 그때 책장에 비스듬히 기대 도레스 레싱의 <풀잎은 노래한다>를 읽던 ‘그’가 말한다. “무슨 책 찾으세요?” ‘나’가 대답한다. “켄키지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찾고 있어요.” 책장을 위에서 아래로 훑으며 다시 혼잣말을 중얼댄다. “어디 있는지 안 보이네요. 1960년 작인데...” ‘그’가 ‘나’의 눈길과 손이 닿지 않은 책장의 맨 위쪽에서 책 한 권을 빼내며 말한다. “1962년 작이죠. 여기 있네요.” ‘그’로부터 책을 받아 든 ‘나’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난다. “감사해요. 이 작품을 잘 아세요?” ‘그’는 읽고 있던 책에서 잠시 눈을 떼며 ‘나’ 쪽으로 몸을 빙그르르 돌린다. “고등학교 때 데일 와서먼이 각색한 버전으로 연극을 했었거든요. 그때 제가 주인공, 맥머피 역을 맡았어요.” ‘나’의 목소리에 호기심이 묻어난다. “고등학교 때 이 책의 주인공을 연기하셨다?” ‘그’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그런 셈이죠.” ‘나’는 흥미롭다는 듯한 얼굴로 한 발짝을 크게 내디뎌 ‘그’와의 물리적 거리를 좁힌다. “고등학생이 연기하기에 맥머피란 캐릭터가 상당히 무거웠을 텐데, 인물 공부를 많이 하셨나 봐요?” ‘그’가 ‘나’의 손에서 책을 가져와 책장을 넘긴다. “먼저, 맥머피가 랫치드 수간호사가 상징하는 판옵티콘 같은 감시체계에 왜 반발했을까를 고민했어요. 그것도 수간호사의 비위를 거스르는 특유의 장난기와 호탕함으로 말이죠.” ‘나’의 귀는 어느새 ‘그’의 말을 귀담아듣기 위해 쫑긋 선 토끼귀가 되어있다. “반항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그’가 기다렸다는 듯 답한다. “일단, 성향적인 측면이 있겠죠. 기질 자체가 반항아적인 거예요. 이건 양육 환경을 살펴봐야 더 정확히 알 수 있겠지만, 고된 노동을 피하기 위해 정신착란이 있는 척 연기한 그의 모습만 봐도 어느 정도 짐작 가능해요. 또, DSM 진단 기준으로 보면 맥머피는 반항 장애에 속하죠. 권위자와 잦은 논쟁을 일으키거나 적극적으로 권위자의 요구와 규칙을 무시하고 거절하는 것을 즐기니까요. 직간접적으로요. 랫치드가 공동체 치료 이론이랍시고 회의에서 하딩의 성적 수치심을 공개적으로 자극할 때, 그 장면 아시죠?”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대화 속으로 초대한다. “맥머피는 그때 ,하딩을 진실 속으로 끝까지 밀어 넣어 결국 랫치드를 ‘천하의 못된 년’이라 부르게 만들었죠. 이건 주변 상황이나 사람의 심리를 이용해 거대 규칙의 중심부에 대한 믿음을 깨뜨리는 간접 반항의 표식이고요.” ‘나’의 대답을 들은 ‘그’의 얼굴에 만족의 미소가 떠오른다. “비정상적인 거대 규칙에 대한 반발, 그걸, 랫치드는 반드시 제거해야 할 권위에 대한 불복종이자 선동이라고 봤기 때문에 결국 맥머피에게 전두엽 절제술을 시행한 거고요.” ‘그’가 힐끗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한 가지를 제안한다. “우리, 자리를 옮길까요?” ‘나’가 웃으며 묻는다. “더 할 얘기가 남았나요?” ‘그’도 웃으며 대답한다. “이제, 직접 반항의 표식에 대해서 말할 차례잖아요.” 둘은 이렇게 우연한 첫 만남을 계기로 캠퍼스를 벗어난다.


무대가 암전 되며 주인공이 퇴장한다. 슬며시 눈을 떠 마주하는 현실의 공기는 여전히 텁텁하다. 나는 우연이란 옷이 가랑비에 젖어들 듯 나도 모르는 새 스며드는 인연을 계속 상상한다. 처음 만났는데도 오래 알고 지낸 사이 같은 편안함이 느껴지는 관계, 독서를 좋아해 책 이야기로 한 시간쯤은 거뜬히 채울 수 있는 연인, 차이를 받아들이고 일방의 견해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 자아가 철학적이고 개인적이며 주체적으로 성장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인간, 이런 사람이 과연 현실에 존재하려나, 하는 생각에 피식, 실소를 터뜨리면서...


하루의 자투리란 종이 위에 상상의 펜으로 시나리오 한 장 쓰기. 푸석해진 현실의 자아를 촉촉하게 적시기엔 안성맞춤인 처방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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