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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 Nov 07. 2022

깔딱 고개에서

에세이 연습 과제 6 - 실패한 경험과 그것으로부터 얻은 교훈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은 바로 제주도의 한라산이다. 백록담을 선명하게 보려면 운발을 타고 태어나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웅장하고 비범한 구석이 있는 산이다. 나는 생애 첫 등산의 짜릿함을 이 한라산에서 맛봤고, 장장 10시간에 걸쳐 완등을 했다. 비록 뿌연 안개와 사정없이 부는 비바람에 백록담의 ‘백’ 자도 못 보고 내려왔지만, 처음 오른 산이 한라산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라산을 오른 후 생긴 자신감으로 주왕산 가메봉에도 올랐다. 이것도 거의 8시간이 걸려 완주한 등산이었다. 한라산이나 주왕산이나, 남들보다 두 시간 정도 더 걸린 등반이었지만 초보치고는 몹시 대단한 성과라고 생각했다.


한국의 명산 두 개를 정복했다는 알량함에 잠시 전문 산악인이 된 척, 현실을 망각했나 보다. 세 번째로 오를 산이었던 영주 소백산의 해발고도 1,439m가 가소롭게 느껴진 걸 보면 말이다.


‘1,947m 한라산도 오른 사람인데 겨우 1,439m 밖에 안 되는 산은 껌이지, 뭐.’

‘소백산의 소자가 작을 소(小)자인 걸 보니 딱 봐도 쉬운 산이네!’


나는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소백산 비로봉의 비석 앞에 서 있는 대견한 내 모습을 상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나와 고행을 함께 할 도반들이 희방사 매표소 앞에서 모였다. 도반들은 대부분 나이가 지긋한 중년이었고 수십, 수백 번의 등산 경험을 가진 고수들이었다. 그중에는 히말라야까지 갔다 온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화려한 전적 앞에 잠시 주눅이 들기도 했지만, 작을 소자의 소백산 정도면 식은 죽 먹기라 생각하며 첫걸음을 내디뎠다.


처음 몇 백 미터는 가득 찬 자신감 덕인지 오를 만했다. 중간쯤부터 벅차단 느낌이 들면서 도반들이 뒤통수가 작은 점처럼 보이다 드문드문 사라져 갔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확신이 들었을 땐, 휴식 지점에서 가까스로 만난 도반들이 건넨 막걸리 한 잔을 마시고 나서부터였다.


‘산은 이 막걸리 한 잔의 힘으로 오르는 것이지!’


걸걸한 목소리의 주장 도반이 파이팅을 외치며 앞장서자 나머지 사람들이 우르르 그 뒤를 따랐다. 이번에는 뒤처지지 않으리라는 다짐으로 그들의 뒤꿈치를 밟았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 본 거라곤 혼자서 꾸역꾸역 경사를 오르고 있는 내 모습뿐이었다. 속이 메스껍고 편두통에 관자놀이 부근이 지끈거리며 현기증이 났다. 한참 만에 꼴찌인 나를 기다리던 아줌마 한 명을 만났다. 그녀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다가오는 나에게 얼마 안 가면 깔딱 고개이니 힘내라는 응원을 건넸다. 그러고는 희뿌연 흙먼지만 일으킨 채, 축지법을 쓴 듯 이내 시야에서 벗어났다.


느릿느릿한 거북이걸음으로 산길을 오르며 나의 상태를 점검해 보았다. 공복 등산이 다이어트에 최고라는 말에 아침을 먹지 않았고, 초반부터 과한 자신감으로 스퍼트를 낸 탓에 많은 땀을 흘린 상태였다. 거기에다 빈속에 알코올까지 들이켰으니 저혈당증이 온 게 분명해 보였다.


나는 나무 그루터기에 풀썩 주저 않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에너지 바 하나를 까먹었다. 손 떨림이 어느 정도 멈추고 나서야 겨우, 깔딱 고개의 시작을 알리는 계단이 보였다.


‘깔딱 고개에서 백 미터만 더 올라가면 능선이라던데...’


깔딱 고개 앞에서 미련을 버리지 못해 몇 번을 망설였다. 내 마음속에서는 ‘이제 백 미터만 더 가면 돼!’와 ‘백 미터 더 가려다 죽을지도 몰라!’란 악마와 천사의 속삭임이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이성을 찾고, 깔딱 고개란 이름의 유래에 대해 곱씹기 시작했다. 오르기 너무 힘들어 숨이 깔딱깔딱 넘어간다고 하여 붙여진 그 이름, 깔딱 고개. 이런 몸 상태로 깔딱 고개를 오르다간 정말로 숨이 깔딱 넘어갈 것만 같았다. 아쉽지만 발걸음을 돌려야 할 때였다. 나는 끝을 모르고 솟은 아찔한 계단 앞에서 한숨을 크게 한 번 내쉬었다. 입에서 나온 후끈한 공기가 깔딱깔딱 넘어가던 내 숨 대신 깔딱 고개를 넘어 사라졌다.


산 아래 식당에서 다시 만난 도반들이 나를 비웃었다. 제일 젊은 데 제일 산을 못 탄다는 둥, 다 와서 포기하다니 바보라는 둥, 부정적인 평에 어리석었고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들의 축적된 경험 치와 노하우를 비루한 나의 것과 비교하지 않기로 했다.


집에 돌아와 땡땡하게 뭉친 종아리를 주무르며 생각했다. 내가 너무 안일했다고. 세상 모든 일에는 응당 절차와 순서가 있는 법인데, 내가 너무 자만했다고. 장비 발만 세울 것이 아니라 평소 나지막한 뒷산이라도 연습 겸 자주 오르며 체력을 키웠어야 했다고.


다음 날부터 해발 고도 300m 정도 되는 뒷산을 오르며 조금씩 조금씩 등산이 익숙해지는 낌새를 챘다. 산은 한낱 나무로 이루어진 땅 덩어리가 아니라 거대하고 위대한 자연의 서사였다. 땅 속 깊숙이 박힌 나무뿌리 하나에도, 경사를 구르고 굴러 온몸이 둥글어진 돌멩이 하나에도, 땅이 솟고 구름에 닿을 때까지 참고 견뎌낸 인고의 세월이 숨 쉬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좁은 보폭으로 하루아침에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단순한 높이가 아니었다.


매일 오르는 산길이 낯익기도 낯설기도 할 때 나는 겸손해진다. 익숙한 산인데도 길 옆으로 깎아지른 낭떠러지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을 때, 매일 건너는 풀 숲 속에서 뱀 구멍을 발견했을 때 가끔씩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인간이 결코 앞설 수 없는 자연의 섭리가 있구나, 인간의 오만함 앞에 자연이 언제고 침묵하지는 않는구나... 그런 깨달음이 문득 나를 긴장시킨다.


두 번째 소백산에 올랐을 때도 나는 깔딱 고개를 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한계를 정확히 알고, 그것을 뛰어 넘기 위해 투자하는 노력의 중요성을 산이 가르쳐 준 것만 같아서다. 깔딱 고개 하나 갖지 못한 산은 어디에도 없다. 모든 산이 적어도 하나, 많으면 수십 개의 깔딱 고개를 품고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삶의 깔딱 고개를 넘는 문제에서 완전히 열외되어 있는 사람은 없다. 평탄한 능선같은 안정감이 쭉 이어지다가도 경사가 나타나고 결국 문제의 깔딱 고개에 다다른다. 험난한 생로에서도 포기 않고 꾸역꾸역 봉우리를 넘는 집념과 끈기, 그것으로 말미암아 깔딱 깔딱 넘어가던 숨이 돌아오는 정상에 서게 되고, 사는 동안 겪을 수 밖에 없는 수많은 문제 중 하나를 극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은 걷기 힘든 길 위에서 고유한 서사를 쌓아가는 과정을 등산이자 인생이라 여기기로 했다. 도전과 극복의 사이클 속에서 서서히 쌓여 가는 성취감과 뿌듯함이 어느 순간 나를 훌쩍 성장시킬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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