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법
에세이 연습 과제 8 - 나에게 용기란.
내가 켄키지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좋아하는 이유는 주인공 맥머피가 나와 닮아서다. 켄키지는 ‘치료 혹은 민주주의로 그럴싸하게 포장한 통제와 지배를 거부하는 자’로 맥머피를 소개한다. 이 부분이 나에게 묘한 만족감을 선물했다.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나뿐인 것은 아니구나 싶은 동질감으로 말미암은 감정이었다. 물론, 맥머피의 말로는 닮고 싶지 않다. 지위를 이용해서 자신의 이상을 강요하는 랫치드 수간호사에 의해 전두엽 절제술을 당하고 결국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상태가 되는 건 그리 내키지 않는다. 맥머피라는 변화의 최초는 체제와 제도, 규칙에 의해 말살되었지만, 그의 죽음이 시사하는 바는 여전히 감동스럽다. 맥머피의 행동에 감화된 ‘추장’이 그를 질식사시킴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선물하고, 아무도 들지 못했던 거대한 쇳덩어리로 정신병원의 창문을 깨 부순 후 탈출하는 장면에 ‘개인의 주체성과 진정한 자유’를 외치던 용기의 결과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읽고 내 주변의 맥머피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그 어디를 둘러봐도 너무나 분명한 권력만능주의에 반기를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책은 나로 하여금, ‘아마도, 이 조직과 사회 속의 맥머피가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했다. 내가 랫치드 같은 본류에 속하든 맥머피 같은 지류의 끝자락에 있든, 내게는 기질적으로 자율성의 보장과 공정성, 그리고 여기에서 기인하는 권력에의 거부감이 도사리고 있던 까닭이기도 하다. 그 무렵 몸 담았던 직장에서 겪은 피동적이고 불공평한 의사결정 시스템이 내 생각을 지지하는데 한몫한 것도 같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관리자가 부재한 교무실에서 그들을 타깃으로 한 험담이 끊이질 않던 날이었다. 이유인 즉, 관리자가 부서별 1년 치 교육 예산 집행 계획을 자신의 구미대로 짜, 부장과 실무 담당자에게 강요한 까닭이었다. 그중에는 내가 예산 집행의 주체인 활동도 있었는데, 전례 없는 역병이 창궐한 상황에서 위험 부담이 가중될 수밖에 없는 외부 활동이 상당수 포함되었다. 누구보다 교사, 학생인 교육 주체의 의견을 가장 충실히 반영하여 현실적이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결정해야 하는 교육 활동의 대부분이 한 두 사람의 권력자에 의해 독재적으로 진행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맥머피가 되기로 했다. 이 결정으로 하여금, 권력과 권위를 구별하지 못하는 자가 만들어 놓은 길을 무작정 따라 걷는 사람들과 나의 행보가 판이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잘못된 것을 잘 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의지와 용기, 잘못된 지도를 따르지 않겠다는 바름과 당당함이 타인과 비교할 수 없는 나의 진면모라고 생각했다. 막연하지만 잘못된 과정이 바로 잡힌다면 결과 따위는 어쩐지 상관없을 거라는 예감이 내 결정에 힘을 보탠 것도 같다. 어찌 됐든 내가 전두엽 절제술을 받을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예로부터 대중에게 힘을 보탰던 이들은 모두 대중 속에서 나왔다. 전근대 시대의 사회, 계급, 도덕적 모순과 부조리를 풍자하며 피지배층의 애환을 해학으로 승화시킨 탈춤도 밑바닥에서 만들어졌으며, 봉건제가 폐지되고 인권 선언이 공표된 프랑스혁명 또한 제3의 신분이었던 평민에 의해 봉기하여 유럽 전역에서 쾌거를 이뤘지 않은가.
나는 수업 시간에 자주 아이들에게 평범한 개인이, 그리고 그들의 힘이 모여 느리지만 온전하게 세상을 바꾼 이런 일들에 대해 말해주곤 한다. 어쩌면, 세상 가장 지치고 나약한 존재에게서 제일 큰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법이라고, 그런 역설이 세상을 낫게 하는 명약 일지 모른다고, 그런 힘이 너희들 안에도 분명 있을 거라고, 지금은 그 힘을 낱낱이 찾아가는 시행착오의 과정이라고, 너희는 모두 강인한 사람이라고 가르치며 내가 만나는 모든 아이들에게 삶의 용기를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