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배우기-토피어리
12시 자정이 넘어 어렵게 잡은 택시. 기사님은 나이 지긋한 어머니 같은 분이셨다. 뒷모습만 봐도 달큼한 연분홍 꽃향기가 날 것처럼 고우신. 기사님이 목적지를 물어보셨다. 택시 어플을 이용한 거라 목적지를 알고 호출을 수락하신 게 아닌가? 싶어 기사님 폰화면에 안 나와요? 하고 목적지를 말씀드렸다. 기사님이 멋쩍게 웃으시며 "아... 화면이 잘 안 보여서요..." 하시는 거다. 생각지 못한 답변에 숙연해지고 말았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가면서 소리없이 혼잣말을 시작했다. "밤늦게 하는 택시... 연세도 있으신데... 어쩌다 이 야심한 시간에 택시를 하시게 된 걸까? 자식들이 걱정하지 않을까? 이상한 손님이 타면 어쩌지 위험할 텐데... 아 근데 몸이 너무 가냘프시다." 등등 엄마가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오지라퍼 모드가 된 것이다. 참을성 없는 나는 "기사님, 뭐 여쭤보고 싶은게 있는 데, 어쩌다 택시를 하시게 된 거예요?" 하고 물었다.
기사님은, "난 애들 다 키워 놓고 이제야 맘 편히 하고 싶는 것들 하면서 살아요. 솔로는 아니지만 솔로처럼 살고 있어요. 집에서 애들한테 모르는 것 물어보기도 눈치 보이고, 같이 대화 나누면서 놀고 싶어도 애들은 바쁘다고만 해요. 애들 고등학생 때까진 난 늘 필요한 존재였는데, 이제 나는 아무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된 건가... 생각해서 우울하게 지냈어요.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보자! 싶어서 낮에는 디자인 학원을 일주일에 한 번씩 다니고, 자고 일어나서 이렇게 마음껏 돌아다녀요. 아이들과 남편은 밖에서 회식하면서 다양한 음식을 먹지만 난 늘 내가 하는 음식만 먹잖아요. 나 혼자 먹으려고 하는 음식은 맛도 없어요. 나도 못 해본일, 하고 싶었던 꿈들을 이루며 살고 싶어서 이렇게 일을 하고 있어요."
백미러에 보이는 기사님의 눈빛에는 총기와 열정이 가득했고, 난 그 눈빛과 행복 에너지에 압도 당한 기분이었다. 비사이로 막가 실력의 수준급 운전을 즐기시는 기사님은 가슴 속 응어리를 풀어내 듯 조곤조곤 말을 이어나가셨다.
"나이가 들면 잘 보이지 않아 슬퍼요. 옛날에는 나도 총명했는데... 그런데 나이가 들면 좋은 점도 있어요. 하고 싶은 것을 걱정 없이 하면서 살 수 있다는 거예요. 근데 안 좋은 건, 자식들한테 상처 받고, 자식들이 더 이상 날 찾지 않는다는 거예요...나한테 기대지도 않고, 나와 놀아 주지도 않고, 나한테 너무 불친절해요. 내가 우리 애들 아기 때 해줬던 것처럼, 애들도 나한테 그렇게 해주면 좋겠는데... 다들 자기 일 보느라 나는 늘 뒷전이에요... 그래도 나는 내가 번 돈으로 우리 애들 예쁘게 입히고 맛있는 것 사주는 게 너무 행복해요. 내 딸이 다른 애들 보다 예쁜 모습을 볼 때가 가장 좋고요. 난 자식이 결혼했어도 늘 자식 생각뿐이고, 내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애들 생각뿐이에요. 누군가가 나를 찾아주고, 내가 불렀을 때 와주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내가 번 돈으로 맛있는 것 사주고, 남편 눈치 안 보고 친구들과 맛있는 것 사 먹고, 나는 너무 좋아요. 심심하게 지내다가 밖에서 돌아온 딸한테 같이 놀아달라고 하면 딸은 바쁘다고 해요. 그 말이 아직도 가슴을 후벼 팠던 상처예요... 손님은 엄마한테 친절하게 대해주세요."
엄마의 꿈은 한 번도 당신을 위한 적이 없다. 그저 가족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사는 거란다. 엄마의 우주는 온통 가족뿐이고, 난 엄마의 세상이 좁고 갑갑하게 느껴져 벗어나려고 했던 심술궂은 철부지 딸이다. 지금껏 날 지켜준 사랑도 모르는.
엄마로 산다는 건 어떤 걸까?
울엄마가 행복하시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