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픈거 다해보기-플로리스트 면접 보기
37살. 신입. 플로리스트. 도전 후.
네 개의. 계절이. 흘렀다.
_플로리스트, 첫 실패를 딛고 재도전하다
작년 5월. 화훼장식기능사 자격증을 딴 후. 신입으로 플로리스트에 계속 도전했지만 번번이 고배였다. 연락조차 오지 않았으니 완패라 해야 하나. 현실적으로 꽃이 아닌 숲을 봐야 했기에 다시 카피라이터 일을 시작했다. 헬스용품 브랜드에서 카피를 맡아 첫 도전에 실패한 흑역사를 만회하고자 야근을 일삼는 정성을 쏟았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지만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플로리스트에 재도전을 하기로 했다.
나는. 무엇을. 잘하고. 좋아할까.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 걸까.
이제는. 한 가지. 일에. 실패해도.
나라는. 사람이. 모든. 면에서.
쓸모가. 없다는. 생각은. 안하기로. 했다.
내가. 할 일은. 나의. 길을. 가는. 거다.
_재도전한 플로리스트, 면접 기회가 스윽
회사를 그만뒀으니 시간이 있을 때 뭐라도 해놔야 할 거 같았다. 실패로 끝난 지난 첫 플로리스트 도전은 맨땅에 헤딩하는 느낌이었지만 맨땅이 파이긴 했나 보다. 지난 실패의 교훈으로 내성이 생겼달까. 플로리스트를 재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력서를 보충하기 위해 포트폴리오(학원과 개인적으로 만들었던 꽃 작품)를 추가하고 '안되면 어때' 마인드도 추가했다. 이번에는 시야를 넓혀 호텔부터, 소규모 웨딩&돌 세팅 중소기업, 가든카페&플라워숍, 온라인 꽃시장 등 다양한 플라워 업계에 손을 뻗었다. 김칫국 드링킹이지만 여러 군데에서 연락이 올 것을 대비해 헷갈리지 않도록 10군데 정도만 지원을 했고 드디어 한 군데에서 연락이 왔다. 드디어 내게도 면접의 기회가 온 것이다.
내면의 소리를 듣고 자신의 삶을 살라.
-타샤 튜너-
_오늘의 꽃에 도전한 오늘의 도전
온라인 꽃시장 오O의 꽃이라는 곳에서 연락이 왔다. 플로리스트 도전 이래 온 첫 연락이었다. 타샤 튜너가 내면의 소리를 듣고 자신의 삶을 살라고 했듯. 오O의 꽃에 도전한 오늘의 도전은 내면의 소리를 따라간 결과였다. '설마-될까'의 마음과 '혹시-될지도 몰라'의 마음이 쌍쌍바처럼 자리 잡았지만 방점을 '혹시-될지도 몰라'에 두기로 했다. 당장 할 일은 걱정이 아닌. 눈앞의 일. 면접 준비였다. 꽃 소재에 대한 기초 공부부터 그동안 해왔던 꽃꽂이를 복기하며 머리에서 시뮬레이션을 해봤다. 면접 볼 회사의 홈페이지, 뉴스, SNS 등을 통해 회사의 브랜드 스토리, 최신 정보와 제품 종류, 주요 상품, 진행 중인 이벤트, 판매점, 소비자 반응 등을 수집했다. 더불어 꽃시장 동향과 업계에서 선점 자리를 차지한 꾸까, 어니스트 플라워, 마켓컬리 등의 타사도 훑어봤다. 면접에서 어떤 질문이 나올지 모르니, 최대한 모을 수 있는 정보를 모으고 공부했다. 무엇보다 현직 플로리스트들이 운영하는 유튜브와 블로그, 인스타그램(@janepackerflowers @grove008 @putnamflowers @markcolle @paulapryke @tulipinadesign @may.fleur)도 한 번씩 더 들여다보며 플로리스트의 삶 속으로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내가 플로리스트에 얼마나 진심인지 마음을 들여다봤다. 그만큼 절실한지. 그 절실함으로 꽃의 세계에서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 포부를 되짚었다.
_희망을 부르는 면접 전 루틴
회사는 개포동에 있었다. 우리집에서 1시간 정도의 거리였고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하니 넉넉히 1시간 30분 전에 출발했다. 나에게는 면접을 보기 전 루틴이 있다. 20~30분 정도 일찍 도착해 회사 주변의 분위기를 점검해 본다. 김칫국 드링킹 모드를 시전하여 합격이 됐을 경우를 대비해 좋은 점이나 극복해야 할 것들을 찾아보는 것이다. 맛집이나 점심 후 산책할 곳 같은 것들을. 이런 의식의 흐름은 일종의 희망을 부르는 면접 전 루틴이다. 면접 중에 무의적으로 튀어나오는 단어마저 회사-친화적일 수 있도록 해주는 루틴. 면접 전 10분에 맞춰 면접 장소로 올라갔다. 인사팀 담당자에게 연락을 하고 안내받은 회의실에서 대기했다. 역시는 역시였다. 꽃을 다루는 회사라 꽃내음은 기본. 곳곳에 꽃들이 예쁘게 꽃꽂이 되어 있었다. 면접 보는 회의실 책상 위에도. 면접관이 올 때까지 그 꽃들과 필러 소재의 정체를 찾아봤다. 비록 신입이지만 꽃에 대한 열정과 지식이 남다르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_20분 면접을 위해 38년을 기다린 보람
면접관은 1명의 플로리스트였다. "플로리스트로 일해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첫 번째 질문이었다. "보통 호텔이나 꽃집에서 일을 시작하시던데 온라인 몰로 오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두 번째 질문이었다. "아무래도 나이가 있다 보니, 제약이 많이 따르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온라인으로 방향을 바꿔봤습니다. 무엇보다 온라인으로 꽃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트렌드라 이왕이면 판매가 많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플로리스트의 일을 시작하고 싶었습니다."라는 뉘앙스로 답을 했던 것 같다. 뒤이어 "학원에서 수업을 들으셨을 때 제시간에 끝내셨나요?"질문이 이어졌고, "대부분 정해진 시간 안에 끝냈습니다"라 답했다. 면접관의 쐐기가 시작됐다. "이곳에서 나이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속도입니다. 여기서는 작품이 아닌 상품을 만들어야 해요. 학원에서는 시간이 여유있게 주어졌을 테지만, 여기는 많은 상품을 정해진 시간 안에 완성도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학원에서는 무조건 칭찬을 들으셨겠지만 여기서는 칭찬보다는 지적이 많을 거예요. 아무래도 처음이시다 보니. 일하신다면 당장은 꽃을 다듬는 일부터 시작하실 거 같고 무거운 것도 많이 들으셔야 할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옹골지게 핵심을 파고드는 질문이었다. 나의 답정은.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네 그럼요. 전 손도 빠르고. 체력도 좋습니다." 나의 답정이 가닿았을까. 면접관의 답정을 알리는 만무했다. 그렇게 20분가량이 흘러 있었다. 20분 면접을 위해 38년을 기다린 느낌이었다. 이걸로 충분히. 보람을 느꼈다. 괜찮아, 잘했어, 충분해. 스스로 다독였다.
_결과를 떠나 기분 좋은 면접
면접이 끝날 무렵 나는 마지막 질문으로 작업 과정을 물어봤다. 면접관은 일련의 과정을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말해준 뒤, "일하는 곳 한번 보실래요?" 하며 작업 현장으로 안내했다. 아. 이곳이 내가 일할 곳이구나. 그 새 또 김칫국 드링킹 모드가 발동했지만 기분 좋은 설레발이었다. 지금까지 많은 면접을 봐왔지만 면접은 응당 이렇게 담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평가절하한다는 느낌 없이, 부풀림 없이, 있는 그대로, 팩트 위주로, 필요한 것만. 면접관의 배웅을 받으며 입구까지 걸어 나왔다. 결과 여부를 떠나 기분 좋은 면접이었다.
_면접 후에 느꼈던 내가 원하는 일상
잘 버틸 수 있을까? 입사를 해서 꽃일을 하다 보면 그다음은 어떻게 될까? 막상 꽃의 세계로 한 발짝 내딛고 나니, 쫄보 모드가 되어 걱정이 요동쳤다. 안돼도 걱정. 돼도 걱정. 이럴 땐 송강호 영화배우의 '뭐 어때' 뱃보로 멘털을 잡아보지만 쫄보의 걱정이즘은 늘어만 갔다. 면접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 걱정이 생길 땐 지금 당장 할 일에 집중해 본다. 때마침 며칠 전에 주문한 노지 콩잎이 집에 도착했다는 문자 메시지가 왔다. 시들기 전에 물김치를 담아야 한다는 의미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장 봐갈 목록을 물어보고 청양고추와 양파를 사들고 콩잎이 있는 집으로 콩콩 걸어갔다. 엄마와 콩잎 물김치를 담그고 저녁으로 아빠와 함께 두부 새우 탕수육과 간장게장을 먹었다. 일상의 찰나들이 앙증맞은 콩잎처럼 켜켜이 쌓여 여물어 갔다. 이것이 내가 원하는 일상의 모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실패한 게 아니다.
나는 잘 되지 않는
1만 가지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토마스 에디슨-
_장밋빛 인생만 인생이 아닌 것을
3일 후. 월요일 오전. 인사담당자에게 연락이 왔다. '잠재력이 뛰어나시지만 안타깝게도-'란 문장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두 번째 플로리스트 도전도 실패구나. 장밋빛 인생을 꿈꾸다 어둠이 찾아온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자기 멸시나 허무맹랑한 희망을 품는 대신 토마스 에디슨 모드로 변신할 타이밍이었다. 나는 실패한 게 아니라 실패에 대처하는 법을 알아가고 있다고. 마크 트웨인의 말처럼 우리는 달과 같아서 누구에게나 보여주지 않는 어두운 면이 있는데, 어둠을 외면하고 장밋빛만 본다고 장밋빛 인생이 되는 건 아니다. 나의 어둠이 장밋빛 희망이 될 수 있고, 내 장밋빛 희망이 어둠에 빛이 될 수 있다. 장밋빛 인생만 인생이 아닌 것이다.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
-사무엘 바케트-
_실패는 나를 더 나답게 한다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는 생각에 무너졌을 때. 실패는 나를 더 단단하게 하고. 나를 더 나답게 한다. 실패했다는 건 도전했다는 반증이고, 무너졌다는 건 노력했다는 반증이니까. 도전과 실패를 반복하며 불혹의 나이를 향해 가면서 내 자신과 나에게 주어진 소명을 알아간다. 38살 신입 플로리스트 도전기. 다음에는 어떤 이야기로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나는 더 행복해질 것이다.
난. 실패한 게. 아니다.
실패에. 대처하는. 법을. 알아가고. 있다.
난. 아무것도. 되지. 못한 게. 아니다.
난. 내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