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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ddmavin project Jan 31. 2023

내가 짐처럼 느껴질 때

나이 듦을 받아들여

언젠가 인산인해인 지하철 승강장에서,

다리가 불편해 보이시는 청초한 할머니가

초로의 신사분께 엘리베이터로

가는 길을 묻는 장면을 봤다.

신사분은 가던 길을 멈추고

손과 팔을 뻗으며 ‘저기로 가세요, 쭈욱’

단어를 바꿔가며 두어 번 말하셨다.

할머니는 고마움을 가득 담아

고개 숙여 인사하고 길을 나섰는데

신사분은 볼일이 끝났는데도

할머니의 이정표가 확인돼서야

제 갈길을 향하셨다.

바로 내 앞에서 바짓단과 신발 사이에

흰 양말을 보이시며 으쌰으쌰 계단을 오르시는데

그 옆에는 보슬한 회색 양말을 신은 수녀님이

신사분을 지긋이 보시다 계단을 총총 오르셨다.

아. 내 앞에 천사 두 분이 걸어가고 계시구나.

나도 모르게 울컥

주책없이 눈시울이 붉어졌다.


‘짐이 되기 싫은 노인들‘

‘딸에게 짐이 되기 싫은 친정엄마‘

‘부모에게 짐이 되기 싫은 자식‘

‘원치 않는 짐꾼‘

짐짓 시중에 떠도는 짐에 관한 자료를 봐도

우리는 누군가의 짐을 짊어지거나

누군가의 짐이 되지 않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하며 살아간다.

그래서인지 간혹 가다 이렇게

무방비 상태에서 느끼는 감동에

살만한 세상과 살아갈 이유를 느낀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단편선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를 이렇게 묘사한다.


“각자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다른 이들에게 사랑과 선행을

베푸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길임을“

(*이 책은 그의 기독교적 사상을 녹여낸 단편이다)


누군가에게 짐이 되는 순간,

어떤 관계는 파국을 치닫지만

인류애가 발현되는

생의 이유를 발견하기도 한다.


사회 곳곳에 웅크리고 있는 소수자,

나와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모두가 귀찮은 짐이라 무시할 때

누군가 환대를 베푸는 순간

선량함과 인류애가 탄생한다.


정신분석가 융의 말처럼 내 나이가

마음에 지진이 인다는 마흔에 가까워서일까.

같은 또래의 남들과 다르게 사는 나는

어디에도 환대받지 못한 채

나에게 조차 짐짝돼버렸고 그렇게

나에 대한 인류애가 무너져 간다.

그래서 공자님은 불혹이 되면

흔들리지 않는 줏대를 가져야 된다 하셨나.

이루지 못한 꿈들이 아스라이

물결 저 너머로 멀어져 간다.


내가 성취한 게 가치가 있기나 한 건지,

지금껏 살아온 역할을 빼고 나면 난 누구인지

쓸모가 사라진 짐짝 같은 나를 부정하면서

날마다 조금씩 나를 잃어 가고 있는 기분이다.


정신분석 전문의가 22년간 파킨슨병을 앓으며

응축한 저서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에서

나이 듦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나이 든다는 것은

내가 소유했다고 생각했던 것들,

내 곁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하나씩 떠나보낼 때가 되었음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찜을 당해왔던 청춘에 집착하며

짐이 되어가는 중년의 한탄일까.

스스로를 짐짝취급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나이 듦의 과정이란 생각이 든다.


내가 짐같이 느껴져 사랑을 베풀 여력이 없고,

나란 짐이 소리 소문 없이 투명해졌으면 할 때

누군가의 선량함을 바라보며 울컥했던 이유를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사라지지 않아도 된다고

살아가도 된다는 토닥임.


반칠환 시인은 꽃에서 한 발 더 나아가면

절벽이라 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볼품없는 화단에

진분홍 백일홍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듯

마지못해 죽음을 기다리는 삶보다

제 시기에 따라 피고 지는 자연처럼

의연하게 흘러갈 수 있다면.


잃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맘으로 살아가는 것.

결국 모두 서로의 곁을 떠나기 마련이니

애착 없는 상태로 나아가면 모든 게 해결될까.

김혜남 정신과 전문의는 되찾을 수 없는 것에

매달리면 더 많은 것을 잃게 된다고 했다.

내가 의미 있게 써야 할 시간과

내가 더 사랑해야 할 사람들 그리고 나 자신까지.


내 몸뚱이가 짐이 된듯한 요즘 오랜 벗에게

짐을 짊어지고 가는 삶에 대한 고민을 토로하자,

‘내 몸뚱이는 짐이 아니고 내 소중한 하드웨어니

소중히 여겨주자’며 짧고 굵은 일침을 날렸다.

침몰하는 바닷속에서 내 짐짝이 두둥실 떠오른다.


(c)엉뚱복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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