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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달빛 Mar 14. 2016

<스틸 앨리스> 우리의 마지막 얼굴을 보네

영화

I am not suffering. I am struggling


몇 년 전, 엄마가 다리 수술을 받았다. 평생 식당을 운영하신 엄마의 고단한 삶을 버티고 버티던 뼈가 닳아서 고장이 났다고 한다. 멀쩡하던 엄마는 느닷없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먹고, 씻고, 싸고, 잘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처음에는 엄마가 이대로 못 걷게 되면 어쩌나 겁이 났고,  닳아서 망가지는 일련의 과정이 '몸'을 가진 인간의 숙명인가 싶어 서러웠다. 어렵게 수술을 했지만 엄마의 다리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결국 재수술을 했고, 그 사이 엄마의 시간만 2배속으로 흘렀나 보다. 엄마의 몸은 확실히 예전 같지 않았다. 엄마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몸'에 익숙해져야 했고, 나는 처음 맞이하는 불안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해 까마득했다. 그즈음 엄마를 자꾸만, 쓰다듬고 만졌다. 서서히 사그라드는 몸, 까무룩 한 기억을 그렇게 붙잡고 싶었다. 수술 이후 엄마의 시간은 불행해진 것일까? 달라진 엄마의 몸과 일상은 젊고 건강한 엄마와 결별한 것일까?


영화 <스틸 엘리스>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세 아이의 엄마, 아내, 콜롬비아 대학교 언어학 교수인 앨리스(줄리엔 무어)는 어느 날 '조발성 알츠하이머'라는 진단을 받는다. 머릿속에 엄청 강력한 지우개가 생겨버린 셈이다. 그의 나의 겨우 50세. 기억을 잃어버리기에는 물색없이 젊고 아름다웠다.


기억을 잃는다는 건 어떤 기분이에요?
내 일부가 사라지는 느낌이야. -앨리스와 딸의 대화

'내 일부가 사라지는 느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 앨리스는 점점 기억을 잃어갔다. 처음에는 자주 사용하던 단어를 잃었고, 조깅하며 매일 오고 가던 길이나 요리 레시피가 기억에서 사라졌고, 사랑하는 딸도 알아보지 못한 날도 생겼다. 그가 맞이하게 된 일상은 분명 이전의 일상과 달랐고, 앨리스는 더 이상 앨리스가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앨리스의 삶을 그저 '고통'만으로 기록하지 않는다. 앨리스는 여전히 앨리스였고 '내가 나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을 정성껏 살아내는 사람이었다. 이 영화 제목이 '스틸 앨리스(Still Alice)'인 이유다.


빠르게 늙어가는 엄마를 지켜보며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다가와 자꾸만 마음이 조급해졌다. 내가 붙들고 싶은 기억과 시간의 퇴적 작용을 거쳐 변하고 사라지는 기억의 어긋남을 인정하기 싫었고, 그것이 꼭 인간의 실패인 것 같아 아팠다. 영화를 영화로 보지 못하고 가슴 한 편이 뻐근했던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앨리스의 시간과 우리가 직면한 시간이 다르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런 불가항력적인 시간 앞에 놓인 나에게 앨리스는 나지막하고도 단호하게 말했다.


전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애쓰고 있을 뿐입니다. 이 세상의 일부가 되기 위해. 예전의 나로 남아 있기 위해. -엘리스


<스틸 앨리스>는 루게릭 병을 앓다가 사망한 리처드 글래처 감독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근육이 마비되어 몸을 잃어가던 그는 기억을 잃어가는 이야기인 소설 <스틸 앨리스>를 만나 죽는 순간까지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가 몸으로 빚은 영화를 우리가 본다. 그는 사라졌지만 영화를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앨리스가 사라지는 기억과 싸우며 살아냈던 것처럼 말이다.


엄마와 앨리스, 리처드 글래처를 통해 나는, 그럼에도 삶을 지속하기 위해 애쓰는 인간의 '존엄'을 읽는다. 앨리스가 여전히 앨리스로 살아냈듯, 엄마도 엄마의 삶을 살고 있다. 리처드 글래처는 마지막 순간까지 몸에 저항하며 영화를 만들었다. 불편하지만 불행하지는 않고, 충분하지 않을 뿐이지 부족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전에는 몰랐던 '상실의 기술'을 배우고 있으니 그럭저럭 괜찮다, 고 할 수 있겠다.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을 보네


<스틸 엘리스>를 보기 전 문태준의 시집을 샀다. 영화를 보며 시집 표제작인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을, 시를 보며 영화를 생각했다.


당신은 나조차 알아보지 못하네
요를 깔고 아주 가벼운 이불을 덮고 있네
한 층의 재가 당신의 몸을 덮은 듯하네
눈도 입도 코도 가늘어지고 작아지고 낮아졌네
당신은 아무런 표정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네
서리가 빛에 차차 마르듯이 숨결이 마르고 있네
당신은 평범해지고 희미해지네
나는 이 세상에서 혼자의 몸이 된 당신을 보네
오래 잊지 말자는 말은 못 하겠네
당신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네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을 보네 -문태준,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 기억을 잃어간다는 것, 소중한 것들이 소멸된다는 것은 영화가 말하는 것처럼 단정하고 우아하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매 순간, 당황하고 낙심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늘 그렇게 망각과 소멸 사이에서 삶을 마주하며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을 보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 시간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 시간을 오롯이 겪는 수밖에 없다. 다만 우리가 싸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든 것이 사라져도 결국 남게 되는 것이 무엇일지 생각하고 기억하려고 애쓸 뿐이다. 짧지만 아름답게 살다 죽는 '나비'라는 이름의 폴더를 만들어 기억을 저장했던 앨리스가 마지막까지 기억하고 있던 하나의 단어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단서 일지 모르고, 그것은 곧 리처드 글래처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며 엄마가 본능적으로 찾아가는 삶의 자리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고통과 죽음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여전히 나'로 치열하게 살아내는 삶에 관한 영화로 기억되어야 마땅하다.


※이 글은 <복음과 상황> 2015년 6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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