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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달빛 Mar 14. 2016

<응답하라 1988> 헬조선이 그린 판타지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응팔)을 재미있게 봤다. 이른바 '열풍'이라 불릴 만큼 이 드라마와 관련하여 많은 생각들이 쏟아져 나왔다. 누군가는 "그땐 그랬지" 하며 그 시절을 추억하고, 반대편에서는 정색하며 '추억 팔이'를 경계하기도 했으며 어떤 이는 드라마가 생략하는 그 시절의 이면을 언급하며 사회 문제를 가족주의로 치환했다 비판했다. 어떤 의견에는 공감이 가고, 어느 의견은 '오버'다 싶었다. 드라마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일 수는 있겠으나 드라마가 보여주는 세상 혹은 애써 보여주지 않는 세상에 관해 생각해볼 수 있다면 드라마를 더 입체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런 생각을 해봤다. 응팔이 판타지라면 그 판타지가 구현한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긍정적인 의미로 생각해보자면 '공동체'가 아닐까 싶다. 쌍문동 골목이 요즘과는 달리 사람 사는 정으로 풍요로웠던 이유는 아마 공동체적 삶이 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집주인이 전셋값 올려달라고 하기는커녕 오히려 음식을 함께 나누고, 스스럼없이 왕래한다. 청소년이든 어른이든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고, 전교 989등(999등에서 무려 10등이 올랐다)과 전교 1등이 절친일 수 있다. 누구 집 자식이든 함께 먹이며 재우고, 각자의 형편을 존중하면서도 서로 돕는 공동체. 기꺼이 서로의 곁이 되는 사이. 그런 공동체가 가능한 동네-골목이 바로 응팔이 구현한 판타지다. 사실, 우리가 부러워하는 것이 바로 이런 풍경 아닐까? 판타지가 우리에게 없거나 지향하는 바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응팔은 굉장히 슬픈 판타지이다. 이 드라마를 '사극'보듯이 보고 있는, 이런 풍경을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청소년이나 청년들에게는 인간 세계에 관한 판타지가 아니라 '중간계'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일 테니까. 


응팔이 보여주는 두 번째 판타지는 '가족'이다. <응답하라 1997>(응칠)에서 시작하여 <응답하라 994>(응사)를 거쳐 응팔에 이르기까지 이 드라마의 주요 관계는 '가족'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세 드라마는 각각 시원이네(응칠), 나정이네(응사), 덕선이네(응팔)를 중심으로 주인공과 그 친구들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는데 과거뿐 아니라 현재 시점에서도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가족'을 이룬 것으로 나온다.  "내 끝 사랑은 가족입니다"라는 드라마 포스터가 드러내듯  응팔은 응답 시리즈 중 '가족' 판타지의 끝판왕을 보여주었다. 


과거 시리즈는 성동일 가족을 주요하게 다뤘다면 응팔은 쌍문동 전체가 가족으로 불려도 무방한 관계들이었다(실제로 그들은 결혼을 통해 진짜 가족이 되기도 했다). 그 가족 체계 안에서 아이들은 안전하며, 가족 바깥세상의 일인 '데모'는 가족(특히 엄마)의 지극한 사랑을 극대화하여 보여주는 소재로 쓰인다. 물론 가족을 보여주는 일 자체가 '판타지'일리는 없다. 그렇다면 '남편 찾기'를 통해 구현되는 현재 시점의 가족은 어떤가? 드라마가 구현한 현재 시점의 가족이란 '중산층 전문직 가정' 즉, 직업도 탄탄하며 먹고 살 걱정 없이 과거를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는 사람들의 가족이다. N포 세대, 헬조선이 화두가 된 세상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판타지 아닌가? 


응답 시리즈를 모두 봐 온 드라마 관찰자의 시선으로 보자면, 이 시리즈는 중반 이후부터 급격하게 이야기 밀도가 떨어지는데 그 이유는 '남편 찾기'에 몰두하느라 '가족 바깥의 존재'에 관심을 두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시점이 지나면 주인공 외 다른 친구들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드라마는 이상하리만치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런 흐름을 조금 확장시켜 생각해 본다면 응답 시리즈는 '가족 바깥의 세상'을 추억을 위한 매개나 소품으로 쓸지언정 이야기로 현재 시점으로 풀어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응팔이 다른 시리즈보다 더 인기 있는 이유는 응답 시리즈 중 비교적 여러 가족이 등장하여 '가족 바깥의 가족'의 구조를 지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역시 '가족'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내가 이 드라마를 보며 감상에 젖는 기성세대의 말과 글들을 부질없다 여기는 이유는 위와 같은 풍경을 그저 "그땐 그랬지" 정도로 소비해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드라마는 드라마로 보자"며 정색할지 모르겠으나 "그땐 그랬지" 다음에 "지금은 왜 안 그렇지?" 정도는 함께 고민하거나 '가족 바깥의 존재들'과 더불어 사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지 않나 싶어 아쉽기 때문이다. 


응팔을 보며 나는 SBS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풍문)의 29-30회를 생각했다. '갑과 을'로 짜인 위계, '금수저 가족 체계' 바깥으로 탈출한 인상과 봄이를 비롯하여 '을'들이 '갑'의 세상과 혈연 가족 체계를 뛰어넘어 연대하고, 행복한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풍경은 굳이 1988년을 소환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생각하고 실현할 수 있는 풍경이다. 물론 풍문의 결론마저 '판타지'로 분류될 수 있겠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응팔은 '퇴행'이지만 풍문은 '지향'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드라마를 보며 던지는 질문은 이거다. 우리는 왜 추억만 하며 실현할 생각은 못 할까? 어쩌면 추억에 머물러 있는 한 응팔은 판타지도 아닌 그저 '자각몽'에 불과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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