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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달빛 Mar 14. 2016

<시그널> 살라, 기억하라

드라마

한때 김은희 작가의 별명은 '연쇄 살인마'였다. 그의 전작 <싸인>과 <유령>에서 주인공들을 죄다 죽였기 때문이다(<쓰리 데이즈>는 건성건성 봐서 기억에 남지 않는다). 그래서 <시그널>의 결말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더욱 궁금했다.


김은희 작가 작품 중 특히 기억에 남는 작품은 <싸인>이다. 주인공 윤지훈(박신양)은 법의학자로서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며 진실을 감추려는 자들과 맞선다. "살아있는 자는 거짓말을 하고 죽은 자는 진실을 말한다"는 신념을 가진 그는 죽은 자의 몸에 남겨진 단서 즉, Sign을 찾아가며 진실에 접근한다. 드라마 전체적으로 훌륭했지만 특히 결말이 내내 기억에 남았다. 결국 윤지훈은 범인을 밝히기 위해 자신이 '진실을 말하는 죽은 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제물이 되었다. 죽어야만 밝혀질 진실, 죽어서라도 밝히고 싶은 진실을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 결국 그의 시신에 남겨진 Sign을 통해 사건은 해결된다. 나는 그의 죽음을 '대속적 죽음'으로 봤다.


<시그널>을 보며 <싸인>이 생각났던 이유는 제목의 의미도 비슷했거니와 삶과 죽음의 의미가 묘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두 작품 모두 진실을 감추려는 자들과 힘겹게 싸우지만 <싸인>은 죽은 자들의 몸과 주인공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사건을 해결해가고 <시그널>은 죽은 자들을 살려내기 위해 살아있는 자들의 연대를 통해 진실에 다가간다. 박해영(이재훈)과 이재한(조진웅)이 무전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바꾸려 했던 이유는 결국 억울하게 희생당한 이들을 살리려는 것이었고, 죽어버린 차수현(김혜수)을 살려야 했고, 박해영의 형과 이재한도 살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주인공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결국 "반드시 살아서 행복하십시오"라는 박해영의 바람과 상대의 행복을 바라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습니다"란 이재한의 말은 우리 모두를 향한 시그널이 되었다.

<시그널> 마지막 회가 누군가에게는 찜찜한 결말로 기억되겠지만 누군가의 희생 즉,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만 겨우 진실을 밝힐 수 있다는 메시지 대신 "살아서 포기하지 않으면 희망이 보인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점에서 나는 <시그널>의 결말이 반가웠다. "죄를 지은 사람이 정당한 댓가를 치르는" 세상이 되길 원했던 그들의 바람은 일부 이뤄졌으나 15년이 지나도 세상은 여전하다. 하지만 살았으니 희망은 있는 것이다. 살았으므로 기억하고, 싸울 수 있는 것이다.


<시그널>의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마치 뫼비우스의 띠같이 흐른다. 어느 날 무전이 시작되고,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과거와 현재가 서로 영향을 미치며 흘러간다. 그런 시간의 의미는 뭐였을까. 드라마처럼 과거를 돌이켜 현재를 바꿀 수는 없지만 미제 사건 즉, 억울한 죽음을 해결하지 못한 과거는 결코 온전한 현재일 수 없다는 것... 우리는 여전히 과거를 돌아보고 기억해야 한다는 의미 아니었을까. 나는 그것을 살아있는 자들의 소명이라 부르고 싶다. 작가가 의도했는지 모르지만 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세월호가 떠나질 않았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미제 사건이 어디 세월호뿐일까. 우리는 그동안 너무 많은 사회적(혹은 개인적) 고통을 해결하지 못 한 채, 개인들을 희생시켜 직선의 시간을 달려왔다. 그런 우리에게 <시그널>은 시간을 돌이켜 결코 과거로 묻어서는 안될 시간을 살게 함으로써 우리를 각성시켰다. 그것으로 이 드라마의 의미는 충분하다고 본다.


아무튼, 김은희 작가는 '최고의 작품'을 갱신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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