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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달빛 Mar 14. 2016

교회를 떠나면 어떤 일이 생길까?

요즘 '교회를 떠나려는 이들'을 종종 만난다. '아직' 떠나지는 '못'했지만 실행 이전 단계로서 자신이 속한 교회 공동체에 대해 마음의 갈등을 토로하는 이들도 많다. 비슷한 과정을 겪었던 입장에서 그 마음에 공감하며 대화를 하다가 한 번 정도 내가 경험한 고민의 과정을 기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오래된 출발과 익숙한 고민

고민은 오래전에 출발했다. 2002년. 나의 모교회인 S교회는 심각한 분쟁을 겪었다. 예배 파행이 반복되고 고소와 고발이 난무하던 교회는 '생지옥'이었다. 그때 나는 교회 떠날 결심을 했다. 호시탐탐 기회만 노렸다. 그런데 어느 날, 청년부 회장 오빠가 나에게 제안을 했다. 교회 분쟁이 해결될 때까지 청년부가 예배실 의자를 치우고 무릎 꿇고 예배를 드리기로 했으며 예배 후 특별 기도회를 하는데 기도회 인도를 맡아달라는 제안이었다. 당시 내가 (비록 날라리였지만) 기독교 단체 간사였기에 제안을 한 것이었다.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었기에 덜컥 그 제안을 받아들여 바들바들 떨며 기도회 인도를 했다. 통곡하며 기도회 인도까지 한 마당에 교회를 떠나려니 미안하기도 했고, 교회를 떠나겠다는 결심을 하자마자 기도회 인도를 하게 된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더 열심히 교회를 다니자고 결심을 했다. 그래서 청년부 임원도 하고, 고등부 교사도 하고, 청년부 간사도 열심히 했다. 내 신앙의 고향 '첫 교회'에 대한 나의 최선이었다.


열심히 교회를 다니며 활동했지만 교회를 향한 고민은 멈추지 않았다. 청년부 목사님에 대한 실망으로 인한 마음의 갈등은 깊어갔고 썰렁한 농담과 피상적 대화로 가득한 공동체 소그룹으로부터 달아나고 싶기도 했다. 교회 친구들이나 동생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소중했지만 교회가 내 신앙에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그때 나를 교회 머물게 한 이유는 대략 세 가지였다.  


첫 번째 이유는 '착한 믿음'이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있게 하신 이유가 있을 거야'라는 믿음은 꽤 강력하여 "교회를 떠나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솟을 때마다 붙들어 여전히 S교회에 머물게 했다. 두 번째 이유는 '셀프 책임감'이었다. 교사, 리더, 간사라는 직분을 버리고 떠나려니 '양떼를 버린 몹쓸 목자'가 되는 것 같기도 하여 스스로 책임감을 짊어지곤 했다. 물론 전적으로 '셀프'는 아니었다. 우리는 그런 말로 너무 쉽게 누군가의 고민을 무시하거나 선택을 지연시키도록 강요해왔다. 세 번째 이유는 '단절에 대한 두려움'이다. 교회를 떠나고는 싶었지만 교회에서 형성된 추억과 관계를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교회에서 형성된 또래 집단과의 유대 관계는 깊고도 강력했다. 어쩌면  나는 그 빌어먹을 추억과 관계를 잃어버리기 싫어 '하나님의 뜻'을 방패 삼아 스스로 '책임'이라는 짐을 떠안고 교회에 대한 고민을 게을리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내가 최초로 교회에 대한 의문을 품었을 때 조금 더 치열하게 고민하며 내 청춘의 기억과 소중한 벗들이 있는 공동체와의 이별을 두려워하지 않고 교회를 떠났다면 어땠을까? 우물쭈물하는 사이, 선택의 시간은 예기치 않게 들이닥쳤다.

교회를 잃고, 신앙을 얻다

내 신앙 여정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시간, 2010년을 맞이했다. S교회는 2002년에 이어 8년 만에 다시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었다면 2002년 분쟁 당시 나는 주변인이었지만 2010년에 어쩌다 보니 교회 분쟁의 한 가운데 서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간단하게 서술하자면 담임 목사의 잘못에 대해 공개편지를 띄워 파장을 일으키고 청년부 간사에서 강제 해임되었다. 해임되고도 몸과 마음의 절반은 S교회를 떠나지 못하고 맴돌았다. 교회 분쟁을 겪어보면 알겠지만 교회가 지옥이 되는 그 충격을 감당하기 힘들다. 일상이 파괴되고, 친구와 원수 된다. 그리고 내가 '신앙'이라 믿었던 많은 요소들이 누군가에 의해 '불신앙'으로 낙인 찍히는 것도 모자라 악마화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좋아하던 집사님과 권사님으로부터 쌍욕을 너무 많이 들어 '욕 많이 먹으면 오래 산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영생하겠구나'라는 생각을 위로랍시고 하게 되었다. 한 몸된 지체의 귀에 주문처럼 저주를 퍼붓는 집사님들, 눈을 희번덕거리며 때릴 듯 손을 치켜드는 남자 집사님들을 건조하게 바라보다가 나도 어느 순간, 어떤 집사님과 몸싸움을 하며 어금니 꽉 깨물고 그를 무릎으로 찍어 누르던 날, 교회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완벽하게 '교회 유목민'이 된 것이다. 그때부터 나의 질문은 바뀌었다. 2002년부터 '하나님이 나를 교회에 있게 한 이유'에 대해 고민했다면 2010년부터는 '하나님이  교회를 떠나게 하신 이유'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질문이 바뀌니 새로운 질문들이 '저요, 저요!' 손들며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여전히 그리스도인인가?'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일까?'

'꼭 교회를 다녀야 그리스도인일까?' 

'교회를 떠나면 내 인생에 어떤 일이 생길까?' 

교회 유목민이 된다는 것은 위와 같은 질문을 매 순간 마음에 새기며 답을 구해가는 여정 한가운데, 홀로 서게 된다는 뜻이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그동안 가보고 싶었던 교회 탐방을 해보자'는 것이 ‘교회 유목민’ 나의 첫 번째 목표였다. 갈 교회를 정하고, 교회 홈페이지에서 예배 시간 확인한 후 찾아가 예배를 드리는 일은 생각보다 귀.찮.았.다.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 동네 교회를 다닐 때와는 다른 차원의 헌신이 필요하며 그 과정 자체가 '나는 왜 여전히 그리스도인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동안에는 '교회'라는 틀 안에 적당히 나를 숨겨 그 틀에서 정한 질서에 순응하며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면 이제는 나 스스로 매 순간 '그리스도인'의 의미를 새기고 증명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입증 책임이 교회에서 나에게로 넘어온 것이다. 신앙을 가지고 난 후 처음 맞이하는 과정이었다. 어쩌면 우리에게 발생하는 대부분의 신앙적 갈등, 교회에 대한 절망과 회의는 이 과정을 경험할 기회를 갖지 못하거나, 소홀히 여기거나, '다른 교회'라는 성급한 결론에 스스로를 복종시키기에 발생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교회를 떠나면 내 인생에 어떤 일이 생길까?

교회 유목민이 된 첫 주일 느낌을 아직도 기억한다. 예배를 마치고 교회 밖으로 나오니, 눈부신 햇살이 나를 환영해 주었다.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카페에 앉아 예배를 복기하며 책을 읽는데 눈물이 찔끔 흘렀다. "아, 주일 오후를 이렇게 누릴 수도 있구나!"


대부분의 (청년) 그리스도인이 맞이하는 주일 풍경이란 이럴 것이다. 오전에 교회 '출근'하여 교사나 성가대로 '근무'하다가 청년 예배를 드리고 소그룹에 참여한다. 혹시나 리더나 임원이면 각종 회의에 참여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저녁을 맞이한다. 교회 규모나 헌신도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본질은 같다. 교회라는 거대한 질서 바깥의 풍경, 폭넓은 사유와 치열한 고민을 누릴 여유가 없다. 그러다 보니 교회란, 가장 익숙하며 안전한 곳이 된다. 그리고 ‘교회 열심히 다닌다=신앙 좋다’는 등식이 성립하므로 교회란 내 신앙을 증명할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된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 익숙하고 안전한 풍경에 머물러 있는 것이 '신앙'이라면 우리는 결국 신앙의 절반만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가장 위험한 공간이 되기도 한다.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게 된다면. 

이제 질문을 던져보자. 가장 안전하고도 위험한 공간, 교회를 떠나면 내 인생에 어떤 일이 생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내 신앙을 둘러싼 단단한 굳은살이 떨어지고 그 속에 숨어있던 보드라운 속살을 만날 수 있다. 또한 이전에는 마주하기 힘들었던 더 폭넓은 세계와 만나게 된다.  


물론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허락하셨고, 공동체를 통해 그의 역사를 이루어가신다는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우리 신앙의 근거를 ‘교회’에서만 찾는다면 그 신앙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주일 예배 꼬박꼬박 드리고, 교회 봉사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단계를 입증하는 ‘자격증’이 될 수 없듯 ‘교회를 떠나는 그리스도인’을 신앙이 부족한 사람들이라 판단할 근거도 희박하다. 오히려 교회 밖에서, 세상 한 가운데서, 인생이라는 고독한 여정 어딘가에서 더 큰 교회와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를 떠나는 그리스도인에게 “당신은 왜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까?”라는 질문이 가능하다면 반대로 교회를 다니는 그리스도인에게 “당신은 왜 교회를 떠나지 않습니까?”라는 질문도 가능하다. 그리고 반드시 그 질문에 대해 책임 있게 대답하도록 고민하고, 합당하게 살아내야 한다.


교회를 떠나려는 이들에게 너무 쉽게 ‘교회 개혁’에 대한 사명감을, 너무 성급하게 ‘다른 교회’를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이전에 신앙 여정에서 만날 수 있는 길동무가 되었으면 좋겠다. 인생도 사춘기, 청년기, 갱년기 등 여러 과정을 거쳐 성숙하듯 신앙 여정도 여러 변곡점을 통해 깨닫고, 성숙하는 것 같다. 그 과정을 서로 존중하고 폭넓게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물론, 문제가 많은 교회, 분쟁 중인 교회를 다니고 있다면 "미련 없이 당장 떠나세요!" 고 강요하고 싶다. 위에 상술했듯 교회에 분쟁이 발생하면 예배당이 지옥이 되는건 한순간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교회는 온전하게 회복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남아서 이 교회를 지켜야 할 것 아닌가?" 라는 헛된 믿음은 버리자. 하나님 뜻에 합당하지 않는 교회는 망하는 게 순리다. 교회가 망하면 누가 아쉽겠나... 하나님이지(아니, 속시원해 할지도 모른다). 


더 큰 문제는 분쟁도 발생하지 않고 지극히 평온하고 깔끔한 상태로 교회가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경우다. 예를 들면, 다수의 찬성에 의해 세습을 결정한다던가, 담임 목사가 설교 때 혐오 발언을 일삼거나,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탄압하는 경우다. '생각없음'의 죄를 저지르는 그 거대한 침묵의 공동체에서 속앓이를 하며 뭐라도 해보겠다고 눈물로 애쓰는 이들을 종종 만난다. 그들을 만날 때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에요. 그러니 그 교회를 떠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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