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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모레비 Jan 04. 2020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용기

당신의 빠른 포기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응원합니다.



나를 위한 인생이 아닌

남을 위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증거




부모님이 실망하실까봐..
남들 다 버티는데 나만 포기할 수 없잖아
괜히 여러 사람 번거롭게


 어떤 것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무거운 부담감을 느낀다. 그 부담감의 이유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지인들과 고민 상담을 해보면 나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없게 만드는 타인 중심적인 책임감이 주된 이유 중 하나였다.


 언제부터 포기하는 행위가 나 혼자만의 생각과 의지로 결정할 수 없는 결재라인이 촘촘한 영역이 되어버렸을까? 내면의 깊은 소리를 무시한 채 포기를 망설이고, 꾹 참아내는 버티는 삶이 우리 인생에서 항상 정답일 수 없다. 혹시나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버텨낸 시간들이 우리의 인생을 갉아먹고 있지는 않을까?




초자아에 압도되어버린 우리


 심리학자 프로이트가 말하는 원초아, 자아, 초자아의 개념은 타인 중심적 책임감이 가져오는 스트레스에 대해 이해할  있도록 도와준다. 프로이트는 성격 구성을   가지 개념을 통해 설명하는데, 건강한 자아는 원초아와 초자아 사이의 힘의 균형을 적절하게 잡아줘야 한다고 했다.


원초아(id) : 욕구/충동 영역 (하고 싶은 걸 해야지)
자아(ego) : 이성적/합리적 영역
(타협점은 없을까?)
초자아(super ego) : 양심/이상적 영역
(도덕적, 사회적으로 옳은 일일까?)


 욕구와 충동 지향적인 원초아가 너무 강한 사람은 본인의 생각대로만 살게 되니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할 수 있고, 양심적이고 이상적인 영역을 관장하는 초자아가 너무 강한 사람은 결국 내가 아닌 타인과 사회적 인정에 중심을 두기에 스트레스가 크다는 것이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무시한 채 초자아에게 힘의 주도권을 내어준 자아는 포기와 작은 실패를 두려워하게 된다. 결국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길을 무시한 채 부모님이 기대하는 혹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




인생이라는 마라톤의 결승선은

하나가 아니다.

 

 어떤 일의 시작을 목적지가 하나뿐인 마라톤 레이스라고 가정하면 포기를 선택하는 것은 결승선을 통과하지 못한 채 멈추는 일이 되어버린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우리에게 중도 포기는 실패와 같은 의미로 머릿속에 각인된 듯하다. 굳이 타인의 영향이 아니더라도 포기하거나 애써 시작한 것을 중단한다는 것은 이렇다 할 결과물이 없이 끝나는 과정이기에 스스로도 자책하고, 좌절감을 느끼기 쉽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각자 다른 빛을 내는 이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이기에 목적지도 다를 수밖에 없다.


 어린 시절부터 형성돼 온 "포기는 곧 실패"라는 프레임은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를 괴롭힌다. 좁은 취업문을 통과하고 어렵게 시작한 첫 직장생활을 포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렵게 퇴사 고민을 털어놓으면 3년도 안 버텨보고 무슨 소리를 하냐며 오히려 철없는 어린아이 취급을 받는다. 그 사이 진로를 수정할 수 있는 황금 같은 시기는 무심하게 흘러간다.



 매일매일 '이게 내 길이 맞나?'라는 생각이 들지만 주변의 기대를 저버릴까 봐, 나를 비웃을까 봐, 회사 생활이 다 그렇고 그렇지라며 애써 자신을 위로한다. 10년 후, 20년 후 내가 진정으로 원치 않고 버텨내며 통과한 결승선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결국 선택에 따른 결과는 그 누구도 책임져주지 않는 온전한 나의 몫으로 남겨진다.




포기는 실패가 아니라

하나의 파일럿 테스트가 끝났다는 것이다.


 태어나 처음 취업한 회사가 나에게 꼭 맞는 평생직장이 되고, 첫 번째 등록한 취미 클래스가 나의 인생 취미가 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또한 처음 사귄 사람과 결혼해 행복하게 살 확률은 얼마나 될까? 잠시 멈추거나 포기하는 것은 실패가 아니다. 단지 파일럿 테스트의 종료 버튼을 직접 누르는 행위일 뿐이다.


 나는 포기를 밥먹듯이 하는 학생이었다. 매일 흙이 잔뜩 뭍은 축구화를 신고 다니던 내게 5~6학년 형들이 입고 다니는 보이스카웃의 단복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단복 위에 붙어있는 배지에서는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고, 어린 내 눈에 비친 형들의 모습은 마치 지구를 수호하는 어벤저스처럼 보였다.



 막상 부모님을 실컷 졸라 보이스카웃 활동을 해보니 밖에서 보던 현실과는 딴판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 엄연한 조직 내의 군기가 있었고, 줄을 맞춰 걸으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를 요구받았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초딩 똥강아지에게 규율을 중시하는 보이스카웃은 비좁은 울타리처럼 답답하게 느껴졌다.


 결국 1년을 못 버티고 부모님께 그만하고 싶다고 말해버렸다. 어린 나이에도 실망감을 드릴 것 같아 걱정했지만 부모님은 잔소리를 전혀 하지 않으셨다. 대신 이렇게 질문하셨다.


 충분히 생각해봤니?
네가 정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라.


 스스로 포기를 다시 한번 고민하고 결정하는 과정은 큰 깨달음을 줬다. 내게 맞지 않는 옷은 빠르고 과감하게 벗어야 한다는 것을. 첫 번째 포기의 과정은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부모님의 기대(?)와 달리 보이스카웃 퇴단 이후 나는 더 쉽게 포기하는 ‘프로 포기러’가 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 시절. 태권도복과 검은띠가 그렇게 멋져 보여 엄마를 졸라 금요일에 도장에 가서 부랴부랴 등록을 하고 도복을 받아왔다. 너무 기쁜 나머지 주말에 그 도복을 챙겨 입고 오락실을 누볐다.



 친구들은 오늘 도장도 안 가는 날인데 왜 도복을 입고 다니냐면서 놀렸고, 짓궂은 유단자 형들은 처음 도장에 나오면 관장 선생님이 어마 무시한 다리 찢기를 시킬 거라고 겁을 줬다. 그 말을 듣자마자 게임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거대한 겁에 짓눌려 수없이 도장을 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하루도 안가보고 겁쟁이처럼 태권도장 등록을 취소해버렸다.


 그 후에도 나는 무언가를 진득이 하기보다는 나와 맞지 않고, 즐겁지 않으면 포기해버리는 아이였다. 끈기 없고, 책임감이 없어 보이는 내 행동이 걱정됐을 법한데 부모님은 한 번도 끈기 없는 아이라고 나를 나무라지 않았다.




빠른 포기를 통해 가슴 뛰는 일을 찾다.


 대학생 시절엔 '프로 포기러'의 강점을 살려 짧은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다. 대부분 2~3일 단기 아르바이트 혹은 1달 정도의 짧은 아르바이트였다. 10개 이상의 짧은 아르바이트를 해보니 몸이 힘들고 짜증만 나는 일과 몸이 고되더라도 그 과정이 보람 있고, 기분 좋은 감정이 드는 일들을 구분할 수 있게 됐다.


 수많은 아르바이트 중 가장 즐거웠던 일은 강의장에서 책상을 옮기고, 명찰을 손수 가위로 자르며 교육을 준비하던 순간이었다. 운 좋게 강사를 소개하는 기회를 가졌을 때는 왠지 모를 감동과 희열이 있었다. 나는 그렇게 교육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이 서른이 넘어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얘기하다 보니 나는 주변에 몇 안 되는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된 사람이었다. 언뜻 보면 끈기 없어 보이던 나의 빠른 포기 인생이 나에게 준 가장 값진 선물이었다. 나는 그렇게 월급날만큼이나 보통날을 즐기는 직장인이 되었다.




마치며. 빠른 포기가 부르는 행복

 

 수없이 포기를 해보며 포기는 실패가 아님을 배웠다. 오히려 포기는 나의 결정을 온전히 책임지고 내 인생을 직접 항해할 수 있는 키를 쥘 수 있는 가슴 뛰는 결정의 순간이었다.


 화려해 보이는 스타트업의 창업자들도 피땀 흘려 일군 아이디어들을 과감히 포기하고 다시 시작하며 그 자리에 올랐다. 그들에게도 값진 포기의 과정이 없었다면 모두가 선망하는 위대한 기업을 일구지 못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은 수많은 프로토 타입과 파일럿 테스트의 연속이다. 정해진 답이 없는 인생에서 실패와 포기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지극히 당연한 과정이다. 올해는 포기는 성공을 위한 또 다른 시작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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