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행복이 찾아오는 비밀
메시와 호날두의 뒤를 이을 축구판의 신성 킬리안 음바페. 음바페는 최고의 실력만큼이나 경기장 밖에서도 철저한 프로정신으로 무장한 듯 보였다.
그는 여러 팬들의 사진촬영 요구에 주저 없이 함박웃음을 짓다가도 촬영이 끝난 직후 무표정으로 돌변해 제갈길을 걸어갔다. 어떤 이에게는 철저한 프로정신으로 보이는 이 장면이 어떤 이들에게는 진정성이 결여된 행동으로 실망감을 줬을지 모른다.
중요한 건 음바페 그 자신이다. 그는 과연 저 순간 행복했을까? 감히 짐작컨대 음바페는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순간 그의 영혼을 담지 않았기 때문에.
너 진짜 영혼이 1도 없다.
즐겁지도 않을 때 웃고 있거나, 공감되지 않은데 무표정으로 박수를 치고 있을 때 우리는 “영혼이 없다.”, “영혼 좀 한 스푼 담아주세요.”와 같은 소리를 듣는다.
자주 듣고 또 자주 쓰는 ‘영혼’이라는 단어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봤다. 영혼을 담는다는 건 무엇인가? 진심으로 임하라는 느낌인 것 같긴 한데 그 진심의 대상은 누구이며,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를 말하는 걸까?
영혼의 사전적 의미는 “정신과 구별되는 일종의 생명의 원리. 살아 있는 사람의 육신에 깃들어서 생명을 지탱해준다고 믿어지는 기(氣).”라고 한다. 영혼의 정의를 마주하자 불현듯 떠올랐다. 이건 꼭 내가 가져야만 할 것 같다. 혼탁한 세상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학문의 경계를 마음껏 넘나들며 세상에 화두를 던졌던 시대의 지성 이어령님. 그는 죽음이 다가올수록 더욱 치열하게 삶에 대해 고민했고, 오랜 암투병으로 죽음을 목전에 둔 시기에 매주 한 기자와 ”삶과 죽음“을 주제로 정기적인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어두운 밤에 찾아오는 병마를 처절히 이겨내고 아침을 맞으며 하루하루 생명의 끈을 놓지 않았던 그는 누구보다 단정한 모습으로 인터뷰 자리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고 한 대화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육체, 정신, 영혼으로 구성된다고 했다. 그는 이 세 가지 요소를 그릇, 물, 그릇 속의 빈 공간에 빗대어 행복한 삶의 조건을 설명했다.
(출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그릇은 육체다. 육체가 없다면 우리는 정신과 영혼을 담을 수 없다. 물은 육체에 담긴 정신이다. 물이 가득 담긴 그릇은 물만을 생각하고, 콜라가 담긴 그릇은 콜라만 생각하고 산다. 똑같은 육체여도 한 번도 같지 않은 게 정신이자 감정이다. 그릇 속의 빈 공간은 영혼이다. 그릇을 비워내었을 때 비로소 영혼이 자리한다. 영혼은 끝없는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 뚜껑이 없는 컵 안의 공간이 세상과 연결되는 것처럼 말이다. 영혼이 자리할 공간을 마련했을 때 나와 세상이 비로소 직면해 이야기를 나눈다.
중요한 일일수록 마음을 비워내라는 것. 멈추면 비로소 채워진다는 것이 바로 욕심과 번민을 내려놓고 영혼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라는 깨달음이 아닐까?
“노동 없는 삶은 부패하고,
영혼 없는 노동은 삶을 질식시킨다.”
- 알베르 카뮈
사회 초년생 시절, 이 문장을 마주하고는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어렵사리 입사한 첫 직장을 6개월 만에 박차고 나왔었다.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반년을 표류하다가 꿈에 그리던 직업을, 그것도 이름 있는 대기업에서 시작하게 됐다. 기쁨도 잠시 살인적인 야근에 또다시 괴로워하며 축 늘어져버린 마음에 이 문장은 경종을 울렸다.
당시에는 영혼을 담은 노동이란 그저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임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불행의 이유는 내 그릇에 넘칠 듯 채워진 못난 정신들 때문이다. 이는 욕망이라고도 부른다. 그릇에 빈 공간 하나 없이 물이 가득 찼을 때, 즉 욕망이 영혼을 짓누를 때 우리는 나 자신을 마주하기보다 타인의 시선, 내가 얻고자 하는 물질적인 것, 피상적 가치에 집중하게 된다.
이름 두 글자만 대면 누구나 두 손 들고 축하해주는 대기업에 입사한 신입사원 A는 늘 출근길이 두려웠고, 불행했다. 내가 진정 원하는 직업을 택하기보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택한 것이 불행의 첫 번째 이유였다. 두 번째 이유는 직장에서 나로서 존재하기보다 출근길에 가면을 쓰고 본래의 나와 다른 얼굴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디에도 진짜 “나”는 없었다.
우리가 진정 행복했던 순간들을 돌이켜보자. 나의 존재자체로서 인정받거나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몰두하는 것을 찾아 나의 정체성을 오롯이 확인할 때다. 말없이 꼬옥 안아주는 포옹에서도 “너는 존재 자체로만으로도 너무 소중하다.”는 말에서도 더없이 큰 위로를 받는다.
꼭 타인에 의해서만 행복해질 수 있는 걸까? 그렇지 않다. 나의 존재와 가능성, 좋아하는 것을 내가 먼저 인정하고, 남과 비교하지 않을 때 비로소 행복은 찾아왔다.
영혼을 담는다는 것은 욕심과 욕망으로 채워진 그릇을 비워내고 세상 그리고 그 너머의 우주와 나의 영혼을 마주하게 하는 것이다. 그릇이 깨지면 담겨진 액체는 흩어지고 증발되지만 영혼만은 영원하다. 그것이 우주와도 통하니까 말이다.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물게 다둥이를 키우며 업계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신 어떤 마케터분이 육아팁을 담담하게 전하던 글이 기억이 난다.
사람들이 일을 그렇게 하면서도 어떻게 다섯 명이나 되는 자식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지 궁금해해요. 저는 시간의 양보다는 질에 집중했어요. Quality time이라고 하죠.
다섯 명의 아빠로서 저는 매일 최선을 다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나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도 그만큼 최선을 다해요.
아이들과 노는 세 시간 내내 일을 걱정하고, 여기 없다면 할 수 있는 즐거운 것들을 떠올리며 붕뜬채로 함께하기보다 비록 한 시간일지라도 최선을 다해서 아이들과의 시간에 진정성을 담아 함께 하는 편을 택한 거죠.
다행히 지금 아이들은 이전보다 저를 더 좋아하고, 아빠가 진정으로 본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 중요한 건 절대적인 양보다 지금 마주한 순간에 영혼을 담는 진정성을 갖는 것이다.
일을 할 때는 어떻게 상사에게 인정을 받을 것인가, 폼나게 일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보다 어떻게 내가 가진 역할과 자원으로 고객의 성공에 더 크게 기여할 수 있을까를 진정성 있게 고민하고 실행하는 편이 성공을 이끈다.
돈을 많이 벌고자 할 때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돈을 벌 것인가를 궁리하기보다 나는 어떤 재능으로 세상에 더 크게 기여할 수 있는가를 찾는 편이 훨씬 낫다. 핵심은 온전한 나로서 나의 영혼을 담아 매 순간 세상과 마주하는 것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지금 당신의 그릇을 채우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위의 문장처럼 불행의 이유는 각자의 그릇 속을 채운 어떤 것들처럼 제각각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비슷한 이유로 행복해질 수 있다. 바로 육체라는 그릇에 영혼을 담을 때다.
불행은 마주한 현실의 본질을 마주하지 않고, 다른 욕망과 정신으로 그 공간을 채울 때 시작된다. 각자의 다른 욕망 속에서 불행의 씨앗은 싹트고 있을지 모른다. 사회적으로 좀 더 인정받기 위해, 좀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좀 더 많이 벌기 위해와 같은 출발점은 우리를 불행의 종착역으로 더 빠른 속도로 이끌 뿐이다.
지금 행복하지 않다면? 내가 마주한 현실과 진짜 본래의 나를 오롯이 직면해 보자. 쓸데없는 욕망들은 덜어내고 말이다. 사실 이 글은 머지않아 불혹을 앞둔 스스로에 대한 다짐의 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