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좁았다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독일인 루카, 멕시코인 하비에르와 나.
출신 대륙도 전부 다른 우리 3명이 서로 알게 된 계기를 돌이켜보면 몇 번이고 이런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의 시작은 바이로이트 대학교에서 친구들과 베를린에 놀러 갔을 때였다. 낮에는 도시 곳곳에 산재한 역사의 흔적을 둘러보고, 밤에는 테크노를 즐기며 베를리너의 삶을 조금이나마 체험해 보았다. 2박 3일간 묵은 우리의 저렴한 호스텔은 크로이츠베르크 (Kreuzberg)라는 동네에 있었다. 해가 진 후 걷기엔 조금 을씨년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세계의 다양한 음식과 문화가 어우러진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덕분에 난생처음 서아프리카 음식을 맛보는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오던 길에 젊은 남자 두 명이 나한테 말을 걸어왔다. 계산대 줄에서 나보다 저만치 앞에 서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구입한 보드카를 이미 병째로 마시고 있었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경계 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그들이 나를 부른 이유는 별 일이 아니었다. 당시 나는 조이 디비전의 Unknown Pleasures 앨범 재킷이 그려진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그 바지가 마음에 든다며 어디서 샀는지 알려 달라는 거였다. 그렇게 말문이 트여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베를린 소재의 대학교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있다는 루카와 그의 친구... 알고 보니 나이대도 비슷한 또래였다. 같이 사진까지 찍었지만, 아쉽게도 따로 연락처 교환을 할 생각조차 못한 채 헤어졌다.
그로부터 넉 달이 지났을까, 한국으로 귀국해 바쁜 일상을 보내며 여행 기억도 가물가물해졌을 즈음, 학교 근처에서 처음 만난 교환학생 친구들과 빙수를 나눠 먹던 날이었다. 멕시코에서 온 하비에르가 한국 이전에 독일에서도 교환학생을 했었다며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베를린에서 반년 정도 공부했다는 하비에르는 테크노를 필두로 한 베를린의 파티 문화에 빠삭했다. 단지 사흘 여행한 나와는 경험의 깊이가 달라 보였지만, 조금이나마 공감대를 느낀 나는 자연스레 대화에 꼈다. 휴대폰 앨범에서 내가 찍은 베를린의 사진을 보여주려던 참에, 하비에르가 그날 밤의 사진을 어렴풋이 봤나 보다.
"잠깐, 네가 이 사람들을 어떻게 알아? 대학교에서 나랑 같이 수업 듣던 애들인데?"
"뭐라고?"
베를린 인구만 해도 360만이 넘는다던데? 하비에르의 입담이 워낙 뛰어났기에 당연히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웃어넘기려 했다. 하지만 하비에르는 그들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동시에 그들의 인스타그램 계정까지 보여주었다. 이름도 간신히 기억하는 수준이지만, 음악을 공부한다던 루카... 사진 속 익숙한 얼굴은 정말 걔가 맞았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집에 돌아와 잠들기 전까지 어안이 벙벙한 기분이었지만, 인스타그램으로 팔로우 신청을 누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팔로우가 수락되었다는 알림을 받았고, 그쪽에서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서로의 간단한 소식만 전하다, 올해 교환학생으로 유럽에 돌아오게 된 후 루카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베를린의 작은 펍에서 맥주를 마시며 독일과 멕시코, 한국으로 연결된 우리의 삼각관계(?)가 얼마나 놀라운지 이야기했다. 이제는 음악을 그만두고 다른 공부를 하고 있다는 근황을 전한 루카는, 겉모습 역시 길거리에서 마주쳤다면 못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작년 독일에서 즐겨 마셨던 바이로이트 맥주의 맛은 그대로여서 기분이 묘했다.
한국에서의 교환 학기를 마치고 멕시코로 돌아간 하비에르도 우리와 연락하며 간접적으로나마 그 자리에 함께 했다. 사진을 보내주니 대충 어느 동네인지 맞출 정도로 베를린을 그리워하는 듯했다. 우리는 헤어질 때 또 한 번의 만남을 기약하면서, 그때는 하비에르도 실제로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작은 희망을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