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게임 친구들
8년쯤 됐나. 롤 하면서 만난 친구들이 있다. 백수일 때 하루 열 시간씩 같이 하던 애들이다. 그때는 정말 하루 종일 게임만 했다. 하루 시작은 '야, 일어났냐?'라는 카톡과 함께 시작했었다. 그리고 밤 늦게까지, 그날 뭔가 게임이 잘되면 새벽까지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렇게 살았나 싶기도 하다.
지금은 그 시절 정돈 아니다. 하루 두세 시간 정도, 이 마저도 서로 시간이 맞아야 한다. 예전만큼은 못 하지만, 그래도 꾸준히 협곡에서 만난다. 이렇게 같이 지낸 시간이 꽤 된다. 게임한 순수 시간만 따지면... 계산해보기도 무섭다. 몇 달은 될 거다. 아니, 어쩌면 1년도 넘을지도. 그렇게 오래 같이 해 온 멤버들이다.
같이 게임하다 보면, 게임 얘기만 하는 건 아니다. 나이도 같고, 다 미혼이라 그런지 할 얘기도 많다. 회사 썰, 연애 썰, 요즘 뭐 샀다, 어디 갔다... 그런 일상적인 이야기를 (게임할 때 말고) 큐 잡을 때 한다.
며칠 전에도 그랬다. 게임 시작하기 전에 한 친구가 심란한 목소리로 말했다.
탑 친구
"나 과태료 나왔어."
우리들
"어? 뭐로?" "어디서?"
탑 친구
"뒤차가 블랙박스 찍어서 신고했대. 아파트 초입 알지? 출근길이라 다들 신호위반하는데, 거기서 걸린 거야. 진짜 짜증난다." (짜증난다는 말은 10배 순화했다)
그 길... 나도 아는 길이다. 아침 출근길이라 다들 바쁘고, 신호 바뀌기 직전에 쭉 지나가는 그 길이다.
우리도 다들 한마디씩 했다.
"와, 그걸 굳이 신고하냐"
탑 친구
"그니까. 아침에 그럴 수도 있지. 그 사람도 그 상황이면 똑같이 했을걸. 세상 참 팍팍하다. 진짜 정없다"
우리들
"요즘 다들 예민해졌나봐."
다들 운전하니 그 기분을 안다. 자연스럽게 친구 편을 들었다.
뭐 잘못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굳이 신고까지 할 일인가 싶고.
탑 친구는 말을 이어갔다.
"과태료 내는 건 낼게. 근데 이제부터 봐. 나도 다 신고할 거야. 니네가 날 악마로 만든 거야."
장난처럼 들렸지만, 분위기는 묘하게 진지했다. 진짜 그렇게 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친구 목소리에 뭔가... 탑라이너의 다짐 같은 게 섞여 있었다.
한참 듣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잠깐. 탑 친구는 세상이 팍팍하다고 푸념하면서, 정작 자기도 그 팍팍함을 만드는데 공을 세우겠다' 라고 말하고 있다. 자기가 싫어하던 그 사람이 되겠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는 거라는 걸, 알고 있을까. 아니면 그냥 넘기고 있는 걸까. 그건 모르겠다.]
비슷한 경험이 있다. 출근길에서 있었던 일이다. 내 앞으로 차 한 대가 깜빡이도 안 켜고 갑자기 가로질러 끼어들었다. 급브레이크 밟을 뻔했다. 정말 짜증났다. 창문 내려서 욕 한바가지 하고 싶었지만 그럴 깜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완전 유치하게 그 차를 계속 째려봤다. 신호에서 멈출 때마다 슬쩍슬쩍 쳐다보고, 마음속으로 '저 차 과속단속 걸리면 좋겠다', '주차할 때 문콕 당하면 좋겠다' 이런 생각까지 했다.
근데 집에 도착해서 생각해보니... 아, 내가 완전 찌질하게 굴었구나 싶더라.
살다보면 '나만 당하고 살 순 없지'라는 생각이 든다. 정작 내가 그걸 싫어했던 걸 알면서도, 나도 그렇게 되고 있다. 세상이 팍팍해서 사람이 그렇게 변한 걸까. 아니면 사람이 그렇게 변해서 세상이 팍팍해진 걸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질문이었지만, 그걸 생각하는 내 마음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그래서 요즘은 '사람이든, 날씨든, 뭐든 기분은 결국 내가 만드는 거'라고 생각하고 다닌다. 누가 뭘 해도,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내 몫이다. 별거 아닌 일로 기분 나쁘게 지내는 건 쓸모없는 짓이다.
그 친구한테 며칠 뒤에 물어봤다.
'그래서 신고 했어?' 했더니 웃으면서 '아니, 그냥... 기분만 냈지 뭐.' 하더라.
역시 사람은 생각보다 착하다.
아니면 게을러서 신고하기 귀찮았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