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시장길
결국 부산으로 떠났는데, 거제도로 도착하기로 했다. 2시간 전만 해도 부산에서 하루 지내고 거제도로 갈 생각이었다. 부산이 관광지로 너무나 잘 알려져있고, 좋은 컨디션에 비교적 저렴한 방들도 많아 하루 놀기엔 너무나 좋은 도시지만 주말이 낀 관광지는 사람이 너무 많다. 사람이 싫은 건 아니지만, 너무 많이 있으면 싫다. 그래서 잠깐 해운대에 들러 사진 몇 방 찍고 거제도에 가려고 한다. 그래도 부산에 왔다는 기록을 남겨야 하니 잘 찍지도 않는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으로 전국일주의 의미를 더했다.
여행 일정이 급하게 바뀐 것은 내 실수였다. 다음 주 친구 결혼식을 다다음 주로 착각하고 여행 계획을 짰기 때문... 다음 주 주말 동네 친구의 결혼식이라는 거대한 일정이 내 자잘한 여행 일정을 바꾸게 만들었다. 그래서 여행 일정을 앞당긴 것도 있다. (엄마, 누나 그리고 조카 태서의 여행 계획이 빠그러졌다 ㅜㅜ)
아무튼 그래서 거제도에 도착했다. 숙소는 거제도 산골 중턱에 있는 조그마한 숙소. 70대 후반 어머니와 50대 아들이 함께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 숙소 전경만 보면 여기가 거제도인지, 논산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한파특보가 내리는 윗지방보다 훨씬 따뜻한 걸 보니 '여기가 거제도 인근인 것 같구나'라고 생각이 들었다. 렌터카를 주차하고 짐 풀고 여행객 공용 마룻바닥에 앉아 노트북을 열 참에 숙소 사장님 어머니께서 전화가 왔다.
"혹시 시장 구경 가지 않을래요?"
지금까지 쌓인 고객 메일, 사무실에 계신 직원분들의 메시지를 확인해야 하는데 고무 망치로 무릎을 친 조건반사마냥 "네, 좋아요. 바로 나갈게요!"라고 대답했다. 여행 중 첫 제안이라서 바로 알겠다 했나?, 마침 술 사러 나가야 할 타이밍에 말씀하셔서 알겠다고 했나, 아니면 우리 엄마 그리고 이모들을 생각나게 하는 숙소 어머님의 모습이 날 이렇게 만들었나 싶다.
숙소 어머니가 날 부른 이유는 이러했다. 일단 일요일 오후 게스트하우스를 쓰는 사람이 나 혼자였던 것. 그리고 내 인상이 좋았던 것 (이건 어머니가 직접 말한 거다 오해 말길), 또 여행객이 시장 구경을 하면 좋다는 사실을 어머니도 알고 있었다.
숙소 어머니의 옵션이 아무것도 없는 모닝을 타고 시장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내가 차에 타고 시장에 도착할 때까지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다.
"내가 지금 시장에 가는 건 대구를 사려고 가는 거예요. 둘째 딸이 지금 캐나다에 사는데, 그 사위 아버님이 몸이 좋지 않아. 근데 맑은 대구탕을 엄청 잘 드시거든. (맑은 대구탕 조리 비법을 한참 이야기하셨는데, 기억나지 않는다. 암튼 진짜 조리법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걸 만들어서 보내야 해. 늙은 양반이 살면 얼마나 살겠다고, 잘해줘도 모자랄 판에…"라는 이야기를 시장 도착할 때까지 하셨다.
시장에 도착해 숙소 어머니는 자주 가는 해산물집에서 대구 한 마리를 샀다. 대구를 손질하는 동남아 청년에게 "헬로우~"라는 정겨운 인사도 나누고, 이 청년에게 꽈배기 오천 원치도 사다 주셨다. 나도 이참에 어머니 단골가게 덕을 보고 밀치회를 싸게 구입했다.
이후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어머니가 주문하신 손질한 대구 토막 봉지를 내가 들고 다니니, 10걸음마다 "무겁진 않죠?"라고 물어봤다. 5kg이 넘는 대구를 들고 있는 날 걱정해주시는 모습과 함께 진심으로 걱정해주시는 조언도 힘껏 하셨다. "나이가 33살이면 결혼해야지. 빨리 결혼하는게 좋아. 그래야 애국하는거야" 등 단 한 번도 중복되는 내용없이 인생 조언 해주셨다.
우리 엄마가 할 법한 잔소리를 실컷 듣다 보니 어느새 숙소에 도착했다. 그리고 숙소 어머니가 이런 상을 차려주셨다.
숙소 어머니와 잠깐의 동행으로 꼭, 엄마 그리고 내 이모들을 보는 것 같았다. 4명의 이모들은 누구 하나 빠짐없이 날 보면 "아이고 아이고" 부터 말하며 손바닥을 어깨부터 팔목까지 쓰담는다. 처음 뵈는 게스트하우스 어머니가 내 팔을 쓰담지 않았지만, 그 눈빛과 감정 그리고 친절함이 이모들을 빛춰보이게 했나보다. 그래서 시장 도는 내내 숙소 어머니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어머니가 산 물건을 양손 가득 들어줬나보다.
암튼 덕분에 저녁밥도 잘 먹고, 먹으면서 유튜브도 다리 쭉 뻗고 재밌게 잘 봤다. 방은 춥고 뜨거운 물도 잘 나오지 않았지만, 잠은 잘 잤다.
다음 날 아침 내가 자는 시간에 어머니는 식당 재료를 준비하러 시장으로 가셨다. 월요일 바쁘게 움직이시는 어머니에게 굳이 '나 갈게요~'라는 인사도 하지 못했다.
나 같은 여행자가 한둘이겠는가. 여행자들이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어머니를 붙잡고 감사하다 고맙다 등의 감사 인사를 얼마나 받았겠는가. 너무 귀찮게 하는 것이 아닌지 싶어, 문자 한 통 남기고 숙소를 떠났다.
한평생 여행자로 살아본 내가 아니어서, 여행자로 느끼는 감정이 어색하다.
이 감정도 조만간 희미해질 텐데, 최대한 간직하고 싶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