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은 계획일 뿐
어찌어찌 한 달 여행을 시작했다. 오늘이 딱 일주일이 되는 날이다. 출발 전 '여행을 글로 기록하자' 다짐했던 나지만, 어찌 지금 첫 글을 쓴다.
베스트셀러를 쓰자는 욕심은 아니었어도, 베스트셀러 작가의 마음으로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써보자 했다. '하루에 하나의 글! 시간이 지나 내가 이 글을 봤을 때, 그땐 그랬었지 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하자'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타이슨의 명언처럼 말이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쳐맞기 전까지는.'
장기 여행은 처음이고, 중간중간 일을 해야 했고, 낯선 여행지에 가면 무조건 술 취해야 하는 나에겐 힘든 계획이었다. 제 3의 벽을 깨고 나온 다른 차원의 내가 이런 말을 한 것 같다. "글을 써? 너 한 대 맞자." 그리고 정말 쳐맞았다.
첫 장은 워케이션을 준비하는 과정을 '신난 감정이 드러나도록' 재미있게 풀어내려 했다. 오죽했으면 인트로까지 준비했다. 친구에게 '나 한달 동안 여행 다녀!', 친구의 대답 '너 일 그만뒀어?'로 시작하고, '출근 안하면 휴가여~'라는 친구의 말을 감명 깊게 이해한 나. 그리고 출발하는 나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이야기였다.
그 다음으로는 첫 여행지 동해로 떠나는 여정을 담으려 했다. 동네 백수 친구를 데리고 가는 일정이었다. 계획 없이 일단 동쪽으로 떠났고, 이때 생긴 에피소드에 누구나 공감하는 우정 이야기를 녹여넣을 생각이었다. 거기에 특별한 내 시선 한 꼬집을 넣은 기막힌 이야기를 말이다.
세 번째로 쓰고 싶었던 건 백수 친구를 집으로 보내고 진정으로 혼자 시작하는 여행 이야기. 그 큰 해수욕장에 사람 한 명 없는 진풍경을 보고 생각에 잠긴 나, 그리고 온갖 궁상을 다 떤 상태로 숙소에 들어오니 웬걸, 귀신 나오기 직전인 컨디션의 숙소. 밖에서 떤 궁상이 진짜 떨어버린 상황. 근데 막상 잠은 잘 자서 '생각하기 나름이었구나'라는 철학적인 메시지를 담으려 했다.
네 번째는 포항 첫 게스트하우스 이야기. 거기서 만난 힙하고 낭만 가득한 사장님, 그리고 나와 비슷한 여행자와 밤늦게까지 와인을 마신 일. 첫 게스트하우스의 낭만과 다음날 덮죽이 너무 맛있어 칭찬 일색인 순간들. 방 컨디션도 좋아 연박했다는 사실까지.
마지막으로는 경주에서 옛날 수학여행 코스를 그대로 따라간 여정을 담으려 했다. 석굴암을 보려 가려면 엄청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부처님을 보려면 이 정도 힘듦은 감수해야 하나? 라는 생각을 하며 잠시 '성인'의 마음을 이해하려 했던 순간. 숙소 예약을 오늘이 아닌 다음 주로 예약해서 예상치 못한 비용 2만원이 추가된 오늘. 성인은 개뿔, 멍청비용*이 아쉬운 순간을 유머러스하게 담으려 했다.
(*친구들과 자주 쓰는 말로, 순전히 자신의 실수로 내게 된 돈. 예약을 잘못하거나, 꼼꼼히 확인하지 않아서 생긴 추가 비용을 자조 섞인 웃음으로 부르는 우리들만의 용어)
현실은 아침 일찍 일어나지 못했고, 운전하는 시간을 무시 못했으며, 중간중간 업무가 걸림돌이 됐다. 혹여나 자유시간이 생긴다면 게으름 때문에 그동안 못 본 유튜브를 봤다. (개인적으로 하루에 1-2시간은 유튜브 시청 시간이 필수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쓰려고만 했지, 행동으로 가져가지 못했다.
여행은 내가 하는 건데. 글을 못 쓴다고 해서 이 여행이 의미 없어지는 건 아니다. 하...씨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 한켠이 불편하다. 여행하면 무언갈 느끼고 배워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었던 걸까. 당일치기 여행도 좋은 걸 보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데, 한 달이면 그 서른 배는 되지 않을까? 게다가 숨만 쉬어도 하루 7-8만원씩 나가는 여행 경비를 생각하면, 그만한 값어치의 깨달음을 얻어야 할 것만 같다. 집에서 플스나 하며 치킨 시켜 먹으면 2만원이면 되는데...
여행이 반드시 나를 똑똑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인생의 진리나 기막힌 아이디어를 발견하게 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의미 있는 변화였다. 마치 거울 앞에 서서 나를 바라보듯, 여행은 나의 생각과 기대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상우형의 말*이 떠오른다. "씨... 똥인지 된장인지 꼭 처먹어 봐야만 아는 인간이니까!" 그렇다. 난 경험해봐야 아는 사람인가 보다. 그리고 그걸 깨달은 것도, 이 여행이 준 작은 선물일지 모른다.
(*오징어게임 1에서 조상우가 성기훈에게 화내며 말하는 대사를 참고)
인생에는 '현재'라는 것이 없다. 과거와 미래만 존재할 뿐*. 지금이 왜 없냐고? 이 질문을 보는 당신은 이미 과거에 존재했던 사람이란 걸. 그러니 다시 오지 못할 현재, 직장인의 한 달 휴가를 즐겨보자.
(*동해 일정을 같이 한 백수 친구가 알려준 문장, 잘 써먹었다)
내일은 부산갈까, 아니면 다른 델 갈까
내일 결정하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