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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감이 준 감(感)

by 오은오

퇴근 시간이 다다른 늦은 오후 사무실에 한 통의 전화가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택배기사인데요. 11층이라고만 적혀있고, 몇 호인지는 안 쓰여있네요. 몇 호세요?"


그렇게 도착한 상자 하나.

영암군 마크와 단감 이미지가 그려진 투박한 박스를 고개 까딱이며 쳐다봤습니다.


'택배 올 게 없는데...', '누가 보냈지?', '이게 뭐지?', '뭐가 들어있지?'


설렘 반, 아주 작은 두려움 반이 섞인 마음으로 상자를 열었습니다.

상자엔 주황빛 도는 단감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었고, 그 위에는 A4용지를 반으로 정성스레 접은 편지가 놓여있었습니다.


색이 쨍~한 단감. 맛있어 보인다!


아! 그 분이 보낸거 구나!






1

사건의 전말은 이러합니다. 평소처럼 작가님들의 원고를 출판했습니다. 출판 작업을 마무리하고 며칠 뒤 서점에 신간 도서가 공개되면, 회사 블로그에 신간 도서 홍보물까지 올립니다. 얼추 한 작품에 대한 사이클이 끝나지요.


작가님들은 종종 출판해 줘서 고맙다고 말씀을 해주십니다. 하지만 이분은 달랐습니다.

"정말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출간을 잘 해줘서...그리고 블로그 글까지 잘 작성해 줘서 고맙습니다."

그 목소리에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부심과 설렘이 가득했습니다.


"정말 고마워서 그런데, 과일 좀 보내드릴게요. 직원분들과 나눠 드세요."

한사코 거절하는 직원의 말을 뒤로한 채, 작가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시고는 전화를 끊으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보내주신 과일이 오늘 오후에 받은 단감입니다.

(작가님들에게 금전적인 도움이나 어떠한 선물도 받지 않습니다. 이것이 저희 원칙이기도 합니다)





2

저희 아버지의 고향은 충남 서천, 어머니의 고향은 부여입니다. 일평생 아날로그 방식으로 살아오신 터라 요즘 기계를 다루는 일에 어려움을 느끼십니다. 그래서 본가에 내려가면 "아들 스마트폰이 안 된다~?", "한 번 봐봐라" 등의 궁금증 해소 질문을 자주 하시는데요. 막상 보면 저에겐 아무것도 아닌 문제입니다.


제가 "이거 누르고 이 화면 뜨면 이때 이거 누르면 돼"라고 알려드리면

어린아이 웃듯이 "히히히 이게 이렇게 되는 거였구먼~"라고 말하며 신나합니다.

단번에 잘하시지는 않지만 그래도 알려드리면 좋아라 합니다.


종종 이 쉬운 걸 여러번 알려드릴 땐 저도 속이 터져 짜증을 내곤하는데,

이럴 때마다 부모님은 "시골 노인네라서 그려~ 네가 잘 알려줘"라고 말씀하시죠.


시골 노인네. 다소 거칠지만, 어딘가 정겨운 명칭.


시골 노인네라는 말을 들으면 정겨운 공기가 느껴집니다.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도 나면서 시골 생각도 납니다. 시골에 가면 뭘 그렇게 많이주는지, 차에 한 짐 싣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죠.


손주도 이렇게 할머니의 사랑을 느끼는데, 자식인 아빠 엄마는 얼마나 더 큰 사랑을 느꼈을까.

서른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 그 시절 할머니가 주고 부모님이 받은 사랑의 감정을 이해 할 수 있을거 같습니다.


노파가 된 할머니를 아빠는 '시골노인네'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제가 아빠 입장이 된다면 저도 역시 '시골노인네'라고 말할까요? 정겨운 의미로 부르긴 할 것 같네요.






3

단감을 준 작가님에게서 시골노인네의 사랑이 느껴졌습니다. 정성스레 포장된 단감 상자를 보며 문득 할머니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이것도 가져가고, 저것도 가져가" 하시던 그 마음이. 직원들의 만류에도 꼭 보내고 싶었던 작가님의 마음 속에도 그런 따뜻함이 있었나 봅니다.


누군가의 마음이 이토록 따뜻하게 전해질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합니다. 한 동안 잊고 살았는데, 신년부터 다시금 배웁니다. 일상적인 노력이 누군가에게는 얼마나 특별한 순간이 될 수 있는지를. 그리고 그 마음을 온전히 느끼지 못했던 제가 얼마나 둔감했는지를. 그리고 항상 올곧은 태도로 지내야 한다는 것을.




단감을 아직 먹진 않았지만, 굉장히 달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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