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안식의 방 #단죄 #자유의지 #실레노스 #썩은 사과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린은 아직 지원과 있다. 친구도 아니고, 미친년이라 욕하며 가버려야 할 상황인데. 말리지도, 화내지도 않는다. 그래서였을까. 억눌러오던 말들이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 차라리 다 나 때문이었으면 좋겠어. 자결하고 끝나면 되잖아. 그런데 태어난 것도 내 탓이 아닌데. 뭘 어쩌라고. 살기 싫어. 초인종도 못 누르고 지겨워.
― 그냥 초인종을 누르면?
― 그러느니 죽지. 그런데 쫄보라 자살도 못해. 말뿐인 한심한 년.
지원은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때린다. 팔에 힘이 빠지자 주저앉아 손에 머리카락을 말아 잡아당긴다. 아린이 따라 앉는다.
― 안식의 방이 있었으면 좋겠다.
―...
지원이 아린을 본다. 아린은 지원의 눈을 거울처럼 쳐다보며 다시 말한다.
― 안식의 방.
흔들리지 않는 갈색 눈동자, 입가의 미소. 지원은 그런 아린의 표정이 당황스럽기도 하고 자신 행동이 민망하기도 해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 가스실 같은 거 말이야?
아린도 일어나 치마의 먼지를 툭툭 털어낸다.
― 아니지. 그건 아니지. 나 그렇게 인류애 없지 않다. 스위스 안락사에 가까운데 절차와 방법을 간소화하는 거야. 아무런 의식도 없이 의사 선생님께서 만들어 주신 그 방에 문을 열고 들어가면 스르르 잠들고 그 상태에서 바로 죽는 거야. 의지를 증명할 필요도 없고, 어떠한 자격도 요구하지 않아. 타인의 심판 없이 언제든 담담히 내가 문을 열고 언제든 들어갈 수 있는 방이야.
― 그러다 후회하면?
― 후회야 항상 하지. 무슨 선택을 하든.
― 충동적으로 죽으면?
― 충동을 느꼈을 때 그만큼 힘들었다는 거 아닐까?
―...
― 얼마나 힘들면 죽을 생각까지 하겠어. 누가 도와준다 해도 결국 남의 일이지 내가 되어 줄 수는 없잖아.
―...
― 그 서사를 어떻게 다 헤아리겠어. 자기가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 너는 안 두려워?
― 나는 안 갈 건데?
― 응?
― 난 죽을 생각 없어.
―...
―그런데 네가 그 방에 간다 고 하면 난 말리지 못할 거야.
―...
― 왜 조용해? 난 살고, 신지원 넌 죽으라고 놔둔다는데. 킹 안 받냐?
― 아, 진짜.
지원은 자신의 아픔을 말하는 것을 스스로 금지해 왔다. 그 감정의 무게를 들으면 다 떠나가버리니까. 손목 상처를 본 영이는 상황을 토스하듯 위클래스를 권하더니 연락을 피했다. 다이어리를 보여줄 수 있냐던 상담 선생님은 지원의 일기를 읽더니 소설을 잘 쓴다며 칭찬했다. 그들에게 딱히 구해달라한 적 없는데 뭐가 그리 부담스러웠을까. 이 불행이 옮는다고 여기는 걸까. 모르는 척, 멀어져 갔다.
그런데 자해 흔적에 관심을 보이고, 죽는 방법까지 고민해 주는 이 별종 계집애. 단 한 번도 친해질 생각 해 본 적 없던 문제아. 지원은 이 못되기로 소문난 여자아이의 반응이 좋았다. 아린은 이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를 밀어내지도, 희석하지도 않았다. 말한 내용 그대로가 전달되었다. 그 느낌이 지원에게 위안이 되었다.
내일 학교에서 아린은 또 자리를 마음대로 바꿔 앉아 그 시끄러운 무리들과 웃고 떠들 거다. 하루 같이 놀아준 건데 자기가 친구인 줄 안다고 조롱할 수도, 지원의 개인사를 학급에 떠벌리고 다닐지도 모른다. 아린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런 모든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지원은 아린이 좋았다. 썩은 사과라도 상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