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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ripza Feb 09. 2022

녹천역에는 운전면허 시험장이 있다

운전을 한 지 이제 막 2년이 넘었다. 면허는 이보다 더 오래 전인 2016년, 그러니까 6년 전쯤에 땄다. 그 당시 나는 공익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퇴근 후에 운전면허를 따기 위한 장소로 녹천역에 있는 운전면허 연수원을 골랐다. 그 당시에는 건대입구나 다른 서울의 중심지보다는 외곽 쪽이 학원비나 도로주행에 있어서 좀 더 장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6시가 되어 퇴근을 하면, 집과는 정 반대인 쪽으로 4호선을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1호선을 갈아타고 녹천역에 이르러서,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배를 채운 뒤에 8시가 다 된 시간에 허름한 컨테이너로 된 건물로 들어가 이론 수업을 일주일 간 들었다. 그렇게 수업이 끝나면 9시. 집에 오면 10시가 넘었고, 그다음 날 아침 8시에 다시 집을 나섰다. 하지만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면허증 취득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론수업 및 필기시험은 거의 만 점에 가깝게 통과했지만 도로주행에서 나는 두 번이나 탈락했다. 기능 시험이야 내가 면허를 딸 시점에는 너무나 간단하게 바뀌었기 때문에 합격을 못하는 것이 더 이상할 정도였지만, 시험 응시료가 몇 배는 더 비싼 도로주행에서 두 번이나 떨어졌고, 주말에만 갈 수 있었던 까닭에 거의 한 달 반의 시간을 면허를 따는 데 소모했다. 

도로주행에서 떨어진 것은 순전히 나의 성격 탓이다. 주위 사람들은 내가 침착하다고 말할 때도 있지만, 어떤 모습으로는 난 굉장히 급하다. 무언가가 빨리 정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고, 그래서 어떤 약속이 생긴다면 장소와 시간을 (하루빨리) 픽스하려는 습성이 있다. 내지는, 내가 이미 충분히 잘한다고 생각했을 때 덜렁거리다가 실수를 한다. 도로주행이 그랬다. 연습 때는 분명히 침착하게 잘했었는데, 시험에만 들어가면 "이까짓 거 빨리 따고 집에 가고 싶다."라는 마음이 앞섰는지 자꾸만 우를 범했다. 한 번은 우회전 또 한 번은 좌회전이었다. 

첫 번째엔 직선 코스가 끝나고 좌회전을 해야 하는 곳에서 신호가 애매할 때 빨리 통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가다가 옆에 앉은 강사가 브레이크를 밟으며 무얼 하는 거냐고 물어봤다. 사실 이건 나의 난독과도 관련이 되어있는데, 이론 시험을 볼 때 노란불이 들어온 상태에서 충분히 속도가 빠르다면 그대로 통과를 해야 한다는 문장이 생각나서였다. 하지만 그것은 계속 직진으로 나아갈 때였고, 좌회전에는 해당이 되지 않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나는 탈락했다. 운전대를 빼앗긴 채 출발지점으로 들어오고, 덜덜덜 떨면서 엑셀도 제대로 밟지 못하는 다음 수험생이 차를 모는 동안 뒷자리에서 멍하니 도봉구의 동네를 바라보며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두 번째엔 다른 코스가 걸렸는데, 직선으로 이 백 미터쯤을 간 뒤에 우회전을 해야 했다. 하지만 이때는 운이 없었다. 우회전을 하고 있는 도중 신호가 바뀌었고, 횡단보도에 녹색불이 들어왔다. 차는 당연히 멈춰 있는 상태였지만, 횡단보도에 바퀴가 걸려 있어 나는 바로 실격을 당했다. 출발한 지 1분은 됐을 까. 이번에도 심사원은 나를 보며 간단히 '불합격입니다.'를 말하고 운전대를 뺏었다. 

두 번의 운전면허 시험을 보며 내가 날린 돈은 시험비와 연수비를 포함해서 30만 원가량이었던 것 같다. 내 돈이 아니라 부모님 돈이었기 때문에 나는 너무나 죄송한 마음이 들었고, 특히 주말에 시험에서 떨어진 후엔 햇살이 적당히 비추는 녹번역에서 나 자신을 자책했다. 나는 왜 계속 우를 범하는가. 愚, 愚회전. 우울했지만 1호선 열차 안에서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성동구에 사는 내가 저 멀리 도봉구까지 와서 운전면허 시험장을 골랐던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감정적인 이유도 있었다. 공익으로 일할 때, 나는 같은 사무실에서 일했던 나보다 연상인 사람을 마음에 둔 적이 있었다. 그가 조금 더 일찍 태어났거나 내가 늦게 태어났다면 거의 두 자리의 나이 차이가 날 수 있었다. 대학교를 이미 졸업할 나이의 어중간한 사회서비스 요원과, 정직원도 계약직도 아닌 무기계약직으로 살아가는 사람 사이엔 미묘한 공통점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여하튼, 그 사람은 쌍문에 살았다. 그래서 퇴근 후에 시간이 맞아 지하철까지 가는 일도 있었고, 녹천에 있는 면허장엘 가면 조금이라도 말을 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관계는 운전면허와는 전혀 달랐다. 운전을 할 때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실수를 했지만, 인간관계에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정지해 있는 상태에 더 가까웠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간단한 인간 간의 물리학을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를 사고 실험에서 실제 실험으로 옮기는 일을 나는 지독하게도 못했다. 그래서 24개월이라는 공익근무 요원 시간 동안에는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고가 나더라도 과감하게 액셀을 밟았어야 했을까? 시간이 흘러 지금 내 나이가 처음 내가 그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이 나이가 돼버렸다. 나는 가만히 있어도, 시간만은 정직하게 흘러간다. 이따금씩 공익 시절을 생각하면, 그리고 그것을 차와 연결하면 내 어린날의 운전면허시험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을 몇 가지 단편적인 기억들이 나를 스친다. 

얼마 전 도봉산에 갔다. 7년 전에 대학교 학회 사람들과 등산 소모임으로 간 적이 있었는데, 저번 주 주말에 독어 수업을 같이 들었던 사람들과 다시 한번 찾았다. 수원에서 버스를 타고 시청역까지 가고, 시청역에서 1호선을 타고 도봉산 역까지 갔다. 녹천 역은 도봉산에 거의 다다를 시점에 나를 반겼다. 옛날과 변한 것은 스크린 도어와 현대식으로 변한 자판기 말고는 없었다. 나는 핸드폰을 열어 지도를 펼쳤다. 여전히 거기엔, 운전면허 시험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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