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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ripza Jul 18. 2022

베를린과 물의 경계 속으로

페졸트 시리즈 1 : <운디네, Undine 2020>

*해당 글엔 영화 내용에 대한 전반적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랑을 다룬 영화는 많다. 도시를 다룬 영화도 많다. 하지만 사랑과 도시의 역사를 동시에 다루는 영화는 많이 없는 듯하다. 하지만 <운디네>가 그랬다. 90분이 조금 넘는 (약간은 짧지만 ‘영화’라는 매체로는 적절하다고 느껴지는) 이 작품은 현재까지 크리스티안 페촐트라는 독일 감독의 최근작이자, 남녀의 사랑이야기 그리고 베를린의 건축 역사를 엮은 작품이다. 

 
 다른 글에서 여러 번 언급했지만, 나는 그의 영화들(<트랜짓>, <피닉스>)등을 보면서 그의 팬이 되었고, 독일에 오면서는 그가 찍었던 영화들의 로케이션을 둘러보면서 그의 영화를 리뷰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시작을 어느 것부터 해야될까. 시간 순으로 갈지 역순으로 갈지 생각했지만, 사람은 공간에 묶일 수 없는 존재여서 나는 내가 현재 머물고 있는 베를린을 주요 배경으로 한 <운디네>를 골랐다. 그리고 아마도, 그의 영화에 대한 리뷰는 개봉 역순으로 진행할 수 있을 것 같다. 



 ‘운디네(Undine)’는 물의 정령이다. 유럽의 신화에서는 꽤나 자주 등장하는 상상속의 존재지만, 나는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영어로 하면 ‘언딘’이 되고, 이것은 과거 세월호 사고 때 등장했었던 민간잠수부들의 조직 이름이기도 했다. 신화 속에서 운디네는 인간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남자가 그녀를 배신하면, 남자는 큰 화를 입거나 죽는 운명이 되고 운디네는 다시 물로 들어간다. 영화 <운디네>역시 큰 줄기는 신화를 따라간다. 영화 시작, 한 카페에서 두 남녀가 마주 앉아있고, 여자(운디네)는 남자(요하네스)에게 매달린다. 그리고 그녀는 ‘너는 날 떠나면 죽을거야.’라는, 조금은 저주 같은 말마저 뱉는다. 그녀는 잠시 기다려달라고 말하고 일터로 향한다. 운디네는 역사학자고, 베를린에서 베를린 도시를 모델로 만든 어떤 기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한다. 그녀는 밖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도시모델에서 요하네스가 있는 곳을 응시하고 그가 계속 거기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일을 마치고 나온 사이 그는 없어져 있고, 그를 찾아 헤맨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 앞에 새로운 남자(크리스토프)가 등장한다. 앞서 그녀의 짧은 도시 안내 가이드 내용이 마음에 들었는지(그리고 그녀도 마음에 들었겠지.) 그녀에게 커피 한 잔을 청하지만 운디네는 그 말이 들리지 않는다. 이윽고 어떤 진동에 의해 카페 내부에 있던 거대한 어항이 그들을 덥치고, 그 순간 그들은 사랑에 빠지고 만다. 이 장면은 영화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운명적인 장면이다. 이 영화에서 물에 대한 이미지는 중요하다. 운디네는 ‘물’의 정령이고, 그녀 앞에 나타난 새로운 남자 크리스토프는 ‘물’속에서 일하는 산업 잠수부이다. 영어 표현으로 fall in love, 한국 말로 사랑에 빠지다, 라는 말이 문자 그대로 영상으로 재현된다. 둘은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고, 그 때부터 운디네는 베를린에서 크리스토프가 머무는 교외로 가면서 사랑을 키운다. 
 


 여기까지만 설명을 들으면 어디에선가 많이 본 ‘운명적인 사랑’을 다루는 평범한 영화 같지만, 사실 운디네가 요하네스를 카페에 두고 나온 후 관광객들에게 베를린 도시의 역사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거의 10분 넘게 이어진다. 도시의 기원과 탄생 그리고 동독과 서독의 건물 차이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양의 대사를 접하고 있자면 잠시 이것이 영화인지 아니면 베를린 시에 대한 다큐멘터리인지 헷갈릴지도 모른다. 그녀(운디네)의 설명에 따르면, 베를린은 본래 습지였고 베를린이라는 단어 또한 슬라브 언어로 ‘습지’에서 왔다고 한다. 그리고 15~16세기에 상인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최초의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이후 500년 정도의 시간을 거치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도시는 점점 커졌고, 습지가 있던 땅도 점점 시멘트로 쌓여간다. 그리고 그 위에 건물들이 지어진다. 이런 말을 운디네가 했다는 것에 주목해보면, 물의 정령인 그녀가 왜 크리스토프가 있는 교외(혹은 시골)로 가는 지 알 수 있다. <운디네>는 현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꽤나 ‘환상적’인 방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그래서 운디네 역시 그녀의 이름과 같이 물의 정령이라고 볼 수 있다. 그녀는 아마도 베를린이 베를린이라고 불리기 전부터 그곳에 살아온 존재일 것이다. 물이 있어야 살 수 있는 그녀가 자꾸만 교외로 나가는 것은 이제 점점 베를린에는 그녀가 설 공간이 줄어든 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스갯소리지만, 요하네스를 다시 찾으로 갔을 때 그녀가 화장실에 들어가 물이 흐르는 수도꼭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잠그는 장면도 그의 연장선 상일 것이다. 물 밖에 있는 그녀 (이미 가버린 요하네스를 기다리는)는 불안하지만, 어항에서 쏟아지는 물을 뒤집어 쓴 그녀 (그리고 새로운 파트너 크리스토프를 만난)는 작은 유리조각으로 상처가 나지만 편안해 보인다. 
 


 교외로 나간 그들은 호수(혹은 강)에서 잠수복을 입고 그 밑을 탐험한다. 크리스토프는 오랜 시간 전, 지금은 물 속에 잠겨버린 어떤 벽에서 Undine♥라고 쓰여진 낙서 내지는 흔적을 발견했다며 그녀에게 보여준다. 아마도 이것은 이 이야기가 동화적이라고 가정해봤을 때, 저 운디네역시 지금의 운디네 임이 분명하다. 그러면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그녀는 이런 운명적인 사랑을 반복해왔다는 것. 그리고 크리스토프가 잠시 한 눈을 판 사이, 운디네는 강에 산다고 전해지는 또 다른 영물인 거대한 물고기 ‘귄터(크리스포트가 물 속에서 터빈을 고칠 때 나타난 존재)’가 그녀를 낚아채간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그의 품으로 돌아오고, 그들은 집에서 사랑을 나눈다. 
 
 꿈과 같은 행복한 시간들이 지나가지만, 영화는 노골적으로 복선을 흘린다. 사무실에서 잠시 낮잠을 즐기던 운디네가 깨어나면서 크리스토프가 선물로 준 잠수부 조각상을 떨어뜨리며 다리가 부러진다. 그리고 이번에는 크리스토프가 그녀를 찾아온다. 둘은 이번엔 베를린 한 가운데에 있는 운디네의 집에서 사랑을 속삭인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녀의 두 번째 베를린에 대한 방대한 가이드가 시작된다. 이번에 그녀가 언급하는 것은 ‘훔볼트 포럼’이다. 본래 이 곳은 왕궁으로 사용되었던 곳인데, 전쟁을 거치면서 폐허가 됐다가 재건을 통해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라는 그리고 그 것에 대한 학문적 의견들도 곁들인다. 크리스토프는 그런 그녀를 보며 똑똑해보인다고 좋아한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녀는 그것을 공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왜냐면 그녀에게 베를린에 대한 과거 역사는 그녀가 책이나 논문으로 획득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직접 눈으로 보면서 경험해온 것일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장면들은 나에게는 오랫동안 의문으로 남았다. 두 번이나 걸쳐 이렇게 장시간 동안 베를린 시의 역사와 건축에 대해 말하고 있다면, 이것은 그저 지나가는 장면이 아니라 사랑과 함께 영화의 한 축을 담당하는 또 하나의 거대한 주제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 이유를 몰랐다. 그러다가 몇 개월이 지난 뒤 열렸던 온라인 GV에서 나는 직접 페촐트 감독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베를린은 건축적으로 강간당한 도시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베를린은 전세계에서 수 많은 사람들, 즉 인종들이 찾아오는 곳이고 그래서 많은 문화들로 뒤섞여 있다. 뿐만 아니라, 현대의 역사를 겪어오면서 수많은 ‘주의’들을 겪었다고 했다. 왕정시대에는 봉건주의부터 시작해서 제국주의는 물론이고 독일이 서독과 동독으로 나뉘어졌을 땐 각각 절반씩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공산주의와 자유주의가 대표로 들어섰을 테니까. 이러한 것들은 도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베를린이 아무런 목표 없이 난개발되고 목적없는 건물들로 수두룩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운디네가 ‘훔볼트 포럼’을 언급한 이유도 여기에 연관되어있다. 원래 왕궁으로 쓰인 건물을 재건시켰다. 그리고 그것을 박물관으로 쓴다? 운디네의 입장이자 자신의 의견을 투영한 감독의 입장에서 이것은 이상한 일이다. 왜냐면, 건축은 처음 지어질 때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그것에 맞추어 내외부의 디자인과 안에 어떤 공간이 위치하는지가 결정된다. 그래서 왕궁을 재건을 했을 때, 그것을 왕궁으로 쓰지 않고 박물관으로 쓰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젠 독일은 왕 대신 총리와 대통령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미 그들에겐 그들의 목적이 맞는 건물들 (국회의사당 / 대통령관저)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생각이 조금은 보수적이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내가 한국에 있을 때 방문했던 몇 가지 문화시설들이 훔볼트 포럼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서 탄생했지만 나는 그것이 오히려 낡은 건물을 다시 잘 활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울역 구역사가 그렇고, 부산의 F1964 그리고 청주의 국립현대미술관이 그렇다. 구역사에서는 기차표를 파는 대신 미술 전시회나 서울역의 역사를 알려주는 가이드가 있고, 폐공장들 각각 리모델링한 부산과 청주의 문화공간은 매력적인 곳이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러니까 바우하우스와 같은 독일의 디자인/건축 이론(인지는 모르겠다)에서 디자인을 정의할 때 ‘목적에 맞는 것’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페졸트도 이와 같은 객체-목적의 일치성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생각한다. 다시, <운디네>로 돌아와서. 그러니까 운디네에게는 훔폴트 포럼이라는 이 공간이 이상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자연에서 살아온 그녀 입장에선 습지는 습지의 역할을 하고, 강은 강의 역할은 한다. 그녀가 봐온 수많은 인간이 지은 건물도 (아마도) 목적에 맞게 쓰여지고, 폐허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 왕궁은 더 이상 왕궁이 아니다. 
 

실제 훔볼트 포럼의 모습


 그리고 이 부분에서 크리스토프와 운디네의 관계가 흔들린다. 크리스토프와 베를린 중앙역으로 가면서 요하네스와 마주친 운디네는 크리스토프의 품에 안기지만 그를 잠시 바라본다. 그리고 어느날 저녁, 크리스토프와 전화를 하던 도중 그는 운디네에게 헤어지는 날 너의 심장이 멈추었던 걸 알았다며, 그때 마주친 사람이 카페에서 운디네가 기다리던 사람이 아니었다고 묻는다. 그리고는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게 맞냐고 물어본다. 운디네는 무언가를 들켰다는 생각에 답을 잠깐 하지 못했다가, 시간이 흐른 뒤에 메시지를 남긴다. 그 일은 미안하고, 그것은 이미 다 지나간 일이라고. 지금 사랑하는 것은 크리스토프밖에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그에게 연락이 없다. 불안한 운디네는 그가 있는 교외로 찾아가고, 거기에서 크리스토프가 이미 수중 작업 중 사고를 당해 병원에서 식물인간 상태로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러니까, 그녀에게 크리스토프가 질물을 한 시점에 그는 이미 병원에서 의식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운디네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녀는 정신이 나간 채로 베를린으로 돌아오고, 이제 자신을 예전에 버린 남자를 찾아간다. 바로 요하네스다. 둘이 헤어지지 않았다면 놀러왔을 호텔의 수영장에 그가 있다. 운디네는 서서히 수영장으로 향하고, 그를 익사시킨다. <운디네>는 이런점에서 현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동화같다. 실제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하지만 영화 내에서 이것의 논리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인물들에게 일어나는 일들과 그 이유가 중요하고 그들이 어떠한 선택을 하고 변화하는지가 중요하다. 요하네스를 익하시키고 운디네는 이제 자신이 원래 있었던 물로 다시 들어간다. 이것이 몇 번째 반복인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크리스토프가 깨어난다.
 


 그래서 아마도, 운디네가 한 행동은 자신을 버린 남자를 죽임으로써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살리는 행위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자신은 물로 다시 들어가야 한다. 깨어난 크리스토프는 운디네를 찾아 베를린으로 오지만, 당연하게도 그녀의 흔적은 없다. 같이 일했던 동료들도 없고, 그녀가 살았던 집에는 그가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이미 살고 있다. 벽에는 크리스토프와 운디네가 흘린 와인 자국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제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향해보려고 한다. 시간은 2년 정도가 흐르고, 크리스토프는 자신과 같이 일하던 동료 잠수부와 연인이 됐다. 그녀는 임신했고, 몇 개월이 흐르면 아기가 나올 것 같다. 사고 이후 멈췄던 잠수부 일을 크리스토프가 다시 시작한다. 거대한 물고기 ‘군터’를 보고, 자신이 사고를 당했던 그 장소에서 그는 또다시 운디네를 마주한다. 일순간 그는 몸이 얼어버린다. 작업을 마친 뒤 정신없이 위로 올라오고, 업무가 잘 된 것을 확인하겠다는 핑계로 녹음된 영상을 확인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정령은 녹화가 될리 없다. 
 


 하지만 크리스토프는 그녀를 잊지 못했다. 그는 새벽에 몰래 집에서 빠져나와 강으로 향한다. 그리고 자신 역시 물로 들어간다. 가슴 조금 위와 고개만 내민채 운디네의 이름을 하염없이 부른다. 하지만 그의 현재 연인이 불안감을 느끼고 어느새 다리 위에 서있다. 크리스토프는 물과 그녀를 번갈아 쳐다보고, 결국 다시 물밖으로 나온다. 이때의 카메라의 시선은 물 속에서 이것을 지켜보고있는 운디네다. 운명적인 사랑은 이렇게 맺어지지 못하고 끊어진다. 크리스토프는 현실(인간 여자)와 이어지고, 운디네는 물에 남는다. 그녀는 또 언제 밖으로 나와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한 가지 명확한 것은, 베를린이 점점 확장될수록 그녀의 입지는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영화는 이렇게 끝난다. 약 90분 분량의 이 영화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담으면서도 그 기저에 베를린 시와 건축에 관한 사회적 담론 또한 포함하고 있다. 나는 그 점이 좋았다. 항상 페촐트의 영화는 표면의 이야기와 기저의 이야기가 같이 작동한다. 그리고 그 기저의 이야기는 독일의 정치적이나 사회문제를 다룬다. 오락영화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힘을 지녔다.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현실의 문제를, 담론 또한 다루는 예술영화가 더 좋다. 나는 영화의 첫 번째 장면을 다룬 카페에 갔다. 정확히는 메르키쉬 박물관. 여기서 커피를 한잔 해야지, 라고 생각했지만 아쉽게도 카페는 없었다. 있었는데 없어진 건지, 영화촬영을 위해 급조된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박물관은 흥미로웠다. 그가 영화에서 운디네의 입을 통해 말했던 베를린의 역사를 박물관이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베를린 시를 모델로 만들어 놓은 공간 역시 방문할 수 있었다. 크리스토프가 처음 이곳에서 운디네가 말하는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했을 모습을 상상하면 설레기도 한다. 그리고 이곳에 실제로 온 것도 믿겨지지 않는다. 영화처럼 가이드 투어는 없었지만 이런 장소에 온 것만으로도 좋은 경험이다. 
 


 페촐트 감독은 베를린에서 TV와 영화를 공부했고 현대 베를린 학파에 속하기도 한다. 그리고 베를린에 산다. 그래서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내가 언젠가 베를린을 걷다가 그를 만날 수 있을 지도? 아직은 독일어가 유창하지 않지만, 1년 이내로는 그의 신작을 한국어자막 없이 보고, GV가 열리면 당당하게 독일어로도 질문해보고 싶다. 그럼 <운디네>의 리뷰는 여기에서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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