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끼어드는 일기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가까운(걸어서 10분을 가야하는) 마트에 가서 장을 보는 일이었습니다. 평소에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과일, 그러니까 사과나 오렌지, 체리 그리고 납작복숭아만 사서 먹었는데, 오늘은 다른 과일을 샀습니다. Zwetschgen와 Zuckeraprikosen이라는, 실은 어제 어학원에서 프랑스 아주머니가 쉬는 시간에 자신이 싸온 과일을 내게 내주었을 때 봤던 것들입니다. 저는 반복되는 것은 싫어하면서, 잘 모르고 확실하지 않은 일을 하는 것에도 능력이 잘 없어서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는 이렇게 중계자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Zuckeraprikosen은 어제 먹어본 식감이 아니었네요. 어제 그녀가 말한 명칭은 ‚미라벨‘이라는, 조금은 근대시대의 공주 혹은 예쁜 성(Schloss) 같은 느낌이었는데, 아무래도 그 과일은 나중에 다시 찾아봐야 될 것 같습니다. 가끔은 베를린의 한 원룸에서 이렇게 홀로 앉아 아침식사를 하고, 책상에서 공부를 하고 글을 쓰는 저를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상상을 합니다. 어떤 영화의 오프닝처럼, 아주 먼 곳에서 혹은 몇 백 미터 상공에서 드론이 저를 찍고 있는 상상. 집을 나와 학원에 가고, 쇼핑을 하고, 미술관을 돌아다니는 나를 또 다른 내가 위에서 지그시 바라보는 상상. 그렇게 나를 보면 어떤 느낌일까... 한편 유투브에서는 제임스웹 망원경이 찍은 아주 멀리 있는 우주의 섬세한 모습을 담은 사진을 감상하면서 480P영상만 보다가 4K영상을 본 것처럼 놀랍니다. 그러다가 문득 보이저 호가 저 먼 궤도에서 찍은 지구, 그러니까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라는 비유를 생각합니다. 거기에서는 대륙도 구분이 가지 않고 당연히 나라도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일순간, 내가 저 안에 있겠구나... 나는 무얼하며 있는건가, 하고 존재의의를 되짚으며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다시 화면의 줌을 당겨 베를린의 하늘을 바라보면 여기엔 까마귀들이 정말 많습니다. 다만 한국과 다르게 검정과 누르스름한 하양이 섞여 있죠. 그들은 주말동안 인간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와 남은 음식들을 주워먹으며 귀에 그리 해롭지 않은 소리를 냅니다. 몇 달 전 인터넷에서 본 어떤 그림이 생각납니다. '의도된 대로는 아니지만 프로그램이 작동 될 때'라는 조금은 긴 이름을 사진 그 사진에서는 새가 날개를 퍼득여서 날아가는 대신, 목을 프로펠러처럼 돌려서 날아가고 있습니다. 그걸 보면서, 나는 어디로 날고 있는건지 혹은 날아가는 대신, 다른 능력을 얻어서 빠르게 달리거나 물 속을 헤엄치고 있지는 않은지도 생각해봅니다.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는 결과론적인 엔딩이 과연 좋은 것일까. 서울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이번주는 엄청나게 비가 쏟아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SNS로 팔로우 하고 있었던 독일 뉴스에서도 서울의 폭우 소식을 카드 뉴스로 만들어서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정도의 폭우면 전세계의 뉴스에 나오겠구나, 싶으면서도 허벅지나 허리까지 물이 차오른 강남 일대의 모습을 보면서 잠시 여기가 내가 20년 넘게 살았었던 도시나 맞나 싶은 당혹감이 들었고 반지하에 살다가 이번 비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 아직 실종 상태인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우울해졌습니다. 이와는 반대급부로 유럽은 폭염이 한창입니다. 스페인에는 큰 불이 났고, 열차에서 누군가가 영상으로 찍은 패닉상태에 빠진 사람들을 봤습니다. 기후가 재앙의 수준으로 바뀌면서 이미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번 수업 때 리투아니아 친구가 말해준 것은, 기후가 바뀌면서 호주에 있는 유칼립투스 나무가 아라비아 반도에도 자라기 시작했고, 특히 이 나무가 건조해서 불에 취약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바라보며 이제는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을 지도 모르는 정상상태의 기후를 걱정합니다. 한편, 베를린에서도 불이 났습니다. Grünewald라는 숲인데, 여기에 있던 경찰 훈련 캠프 같은 곳에서 폭발이 발생해서 불이 났다고 했습니다.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이번 수업의 선생님이 한 말은, 동독지역에는 2차 세계대전때 터지지 않고 남아있는 지뢰나 오발탄이 아직 지하에 남아있다고 했습니다. 서독지역은 이런 위험 요소들을 진작에 제거했지만, 동독정부는 그렇지 않았고, 그래서 아직도 지하에 이런 것들이 남아있다가 가끔 터질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이론으로만 보면 나쁜 것이 아니지만,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 개념을 잘못 사용하면 원래의 의도와는 아주 다른 결과를 초래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탐욕 때문이겠지요. 일요일에는 미술관을 다녀왔는데, 지금은 유명을 달리한 동독 출신의 사진작가의 사진전을 보았습니다. 거기에서 레닌상이 해체되고 철거되는 순간을 찍은 사진을 몇 장 보았습니다. 소련 식 이데올로기를 따르던 동독이 해체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파장은 끝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던 동독 사람들은 무언가를 할 기회가 서독보다 적었고, 그런 그들 사이에서 극우파인 AfD (Alternativ für Deutschland)가 자리를 잡아, 구 동독이었던 주에서는 난민반대나 네오나치 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으니까요. 이것은, 제가 데사우에 갔을 때 가로등이나 벽에 붙어있던 AfD의 선전물을 보는 것과도 연결됐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 저의 모습을 다시 상상합니다. 고향을 떠나 먼 곳으로 오고, 이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알아가는 현재. 수업시간에 다른 외국인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저의 생각이 가끔은 좁고 틀에 갇혀있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어렸을 때 지독하게 많이 보았던 병에 갇힌 벼룩의 이야기처럼, 내가 지금까지 그 벼룩과 비슷한 존재는 아니었는가도 생각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럴수록 밖으로 나가야겠지요. 가끔은 수업을 듣다가 지쳐서 주말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지만 그래도 어딘가를 갔다오고, 누군가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 그런 피로감이 사라짐을 느낍니다. 지금이 아니면 해보지 못할 것들을 큰 고민없이 할 수 있는 이때 그런 것들을 느끼고 글을 쓰면서 이 생활을 영위해 나가고, 7~8월이 유일한 수확시기라는 ‚미라벨‘은 다음에 장을 보러 나갈 때, 혹은 밖에 나갔을 때 다른 마트를 가서 알아봐야되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