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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ripza Sep 25. 2022

어떤 것이 완결의 상태인가?

나는 가끔 음식을 먹기 도중의 사진이나 다 먹은 후의 사진을 찍는다. 그렇지만 그것을 SNS에 올리지는 않는다. 나의 이 행동은 포스트-모더니즘 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존의 질서(내지 개념)에서 탈출하기 위한 시도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음식이 나온 후 사진을 찍는다. 혹은 술이나 음료를 마시기 전에 부메랑을 찍기도 한다. 인스타 맛집이 인기를 끌기도 한다. 


여기엔 두어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갓 나온 음식의 먹음직스러운 상태를 찍는 것과 그렇게 사진을 찍으면 나중에 자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혹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무엇을 먹는지를 소위 '인증'이라는 형태로서 알려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것의 안티테제로 먹는 중이나 다 먹은 후의 사진을 찍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과연 음식의 완성된 상태란 무엇인가?' 음식은 (거의 대부분) 그릇에 담겨있고, 주방장이나 가게의 기호에 따라 데코레이션이나 플레이팅을 신경쓴다. 이것은 분명히 사람의 미적안테나를 자극하기 위한 것이다. 


모종의 (사실은 메뉴판에 이미 다 적혀있는) 식재료들로부터 그것이 가공되고 조리됨에 따라 초기의 상태와는 다른 음식이 탄생한다. '만든다.'라는 개념을 생각했을 때 손님에게 음식이 접시에 담겨 나오는 순간이 음식의 완성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음식의 목적은 '먹히는 것'이다. 먹히지 못한 음식은 시간이 흐르면 썩는다. 그 모습을 영원히 간직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진을 찍어두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편, 사람들은 음식을 먹으면서 그 안에 들은 것들을 추측해보기도 한다. 어떤 것들은 바로 알 수 없지만, 미식가나 음식평론가 혹은 대장금이 아닌 이상에야 감으로만 그것을 맞추는 것은 쉽지 않다. 음식이 점점 없어져가면서 우리는 음식의 단면을 볼 수 있다. 어떤 음식은 겉으로 보았을 때 속을 알 수가 없다. 오무라이스나 햄버거 같은 것들. 물론, 경험적 측면으로서 오무라이스 안에는 보통 볶음밥이 들어있고 햄버거에는 각종 야채와 패티가 들어있을 테지만, 마치 그것은 속을 들여다보기 까지 상태를 알 수 없다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같은 상태다. 


사람들은 음식을 왜 먹음직스럽게 느낄까? 장담컨데,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기를 얻는 방식을 보면 구역질을 느낄 것이다. 자연상태의 동물이 도축을 거쳐 여러 토막으로 잘리고 부위에 따라 잘린다. 식물 또한 식물의 눈으로 본다면 가차없이 날카로운 것에 잘려 나간다. 우리는 위의 과정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음식에는 이런 잔혹성이 숨겨져 있다. 


이런 면에서 음식은 전체가 비극인 장편 소설에서 재미있는 구절 한 부분을 뽑아낸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측면에서, 음식의 단면은 의미가 있다. 누군가에게 먹히고 있는 상황은, 누군가에게서 죽임을 당하고 가공되어 지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남긴음식을 (위생과는 다른 이유로) 보면 혐오스러워하고, 남에게 주는 것이 터부시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는 어떤 외국 작가(데미안 허스트)의 작품들, 예컨대 상어가 반 쯤 잘린채 단면이 보이는 채로 전시된, 것과 이미지가 겹치기도 한다. 


서두에도 말했지만, 나는 이런 사진들을 SNS에 올리지 않는다. 남들에게 사진을 보여주는 것 대신, 나 혼자 그것을 간직했다가 삭제한다. 음식의 잔혹성을 알리려면 멀리멀리 퍼날라야 하는 것 아닌가?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전파해야되는 것은 아닐까? 글쎄, 잘 모르겠다. 이것이 결국 아이러니로 끝나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오늘에서야 이렇게 글을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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