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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ripza Nov 19. 2022

하노버와 옐라<Yella, 2007> 1부

※ 해당 글에는 영화 <옐라>에 대한 스포일러가 가득합니다. 

그리고 중간중간 하노버 여행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 있습니다. 


독일에 와서 회화 과외를 해준 독일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이에른 출신이었고, 수업 중 내가 하노버에 대해 물어보니 자신은 아직 가보지 않았지만 자신의 친구가 말하길 '볼 것이 없는 도시.'라고 말했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내가 들었던 상상 속의 하노버는 '노잼 도시'였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 굳이 하노버를 간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내가 '가보지 않았다'라는 사실이었고 두 번째는 바로 오늘 다룰 영화인 페졸트의 <옐라>의 촬영지였기도 했기 때문이다. 나는 호기심이 많다. 그래서 이렇게 기회가 생기면 그 호기심을 풀어볼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내가 독일에 와서 영화 글, 그러니까 페졸트의 영화와 그 촬영지(Drehort)를 엮은 것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몇 개월도 더 전에 베를린Berlin과 <운디네>에 대한 글을 썼고, 이번이 그 두 번째 시도이다. 



하노버에 대해 간단히 코멘트를 하자면, 이곳은 박람회가 자주 열리는 메쎄슈타트(Messestadt)이다. 내가 여행을 올 시점에도 농업 및 축산업에 대한 박람회가 열리는 시기였고, 그래서 시내에 있는 호텔을 예약하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평범한 비즈니스 호텔이 하룻밤에 이십만 원을 넘게 줘야 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호텔 대신 조금 저렴한 에어비앤비 (그래도 1박에 7만 원이었다)를 예약하여 오게 된 것이었다. 참고로 나는 하노버를 오기 전, 지인이 있는 도르트문트에 삼일 동안 있었다. 도르트문트에 대한 이야기는 독일일기 채널에 나중에 쓸 것 같다. 도르트문트에서 하노버는 ICE로 약 두 시간 정도가 걸렸다. 그리고 내가 느낀 것은, 하노버도 큰 도시라는 것이었다. 가끔 독일 서부 쪽을 갔을 때 하노버에서 환승을 곧 잘하곤 했다. 그때마다 느낀 건 중앙 역이 굉장히 크다는 사실. 그만큼 도시 간 교통의 중심지라는 뜻이기도 했고, 사람이 많이 산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예약한 숙소는 중앙역에서 지하철로 네 정거장 그리고 버스로 갈아타서 네 정거장 정도 가면 있는 Märchenviertel(한국어로 직영하면 '동화주거구역')이었다. 호스트였던 남자는 40대 중반 정도의 키가 아주 컸지만 마른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친절했고 네다섯 살 되어 보이는 그의 아들도 귀여웠다. 숙소에 도착한 것이 다섯 시 반쯤이라 늦진 않았지만 나는 충분히 피곤했고, 샤워를 한 뒤 다음날의 일정을 짰다. 


중앙역과 숙소. 둘은 40분 정도 떨어져 있다.


<엘라, Yella 2007>은 현재까지 나온 페졸트의 영화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시기 상으로 따진다면 초기~중기작으로 꼽을 수 있겠고, 그의 유령 삼부작(Gespenster Trilogie)* 중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의 줄거리를 간단히 설명하면, 옐라라는 여자가 남편의 파산 이후 자신의 고향에 잠깐 왔다가 하노버로 넘어가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다뤘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 그의 최신작들과 비교하면 카메라 구도나 장면의 전환이 투박해 보이지만 내가 이 작품을 가장 좋아하게 된 이유는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것들, 그러니까 주제, 이야기 혹은 연출이었다. 

*유령 삼부작은 <내가 속한 나라, Die innere Sicherheit 2000>과 <Gespenster, 2005 (한국 개봉 안 함; 제목 뜻은 '유령')> 그리고 오늘의 영화 <엘라>로 구성되어 있다. 아직 <Gespenster>는 보지 못했다. 



그의 영화를 두 단어로 함축한다면 '유령'과 '자본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꼭 맞는 표현은 아니지만, 경제학에서도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말을 들으면 마치 그것은 전체 시장을 움직이는 우리를 월하는 존재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엘라>에서 그것은 옐라 그 자신이기도 하며, 자본주의는 그녀를 파멸로 이끌어가는-그것은 수동적이기도 하면서 능동적이기도 하다-주체이기도 하다.  영화의 첫 장면, 자신의 고향인 하노버에서 기차로 한 시간쯤 걸리는 비텐베르게(Wittenberge)에 옐라가 도착한다. 역을 나왔을 때 그녀에게 어떤 사람이 차를 타고 다가온다. 그는 옐라의 파산한 남편이었고, 그녀는 그를 떠난 것처럼 보인다. 남자는 낡은 빨간색 레인지로버를 몰고, 차 안에서는 우울한 느낌의 팝송이 나오고 있다. 그를 어찌어찌 떼어낸 옐라는 집으로 돌아오고, 그곳에서 아버지와 재회한다. 하노버에 있는 '알파 윙스'라는 회사에 취업을 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하룻밤을 자고 그다음 날, 남편이 정장을 입은 채로 집 앞에 서있고, 역까지만 그녀를 데리고 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옐라가 그 차를 탄 뒤 그는 자신의 새로운 사업에 대한 말과, 그를 떠난 옐라에게 폭력을 행사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옐라가 자신과 같이 갈 의향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에서 핸들을 꺾어 강으로 차를 추락시킨다. 옐라는 가까스로 강에서 빠져나오고, 잠시 땅에 누워있다고 까마귀 소리에 깨고 허겁지겁 역으로 향한다. 그리곤 하노버에 도착해 우여곡절 끝에 방에 들어간다. 



이 글이 스포일러의 성격을 띠는 이유는 아마도 이 문단 때문일 것이다. 앞에서 밝힌 것처럼, <옐라>는 유령 삼부작이다. 그래서 차가 다리에 빠진 이후 그녀를 둘러싼 일들에서는 '유령'의 징후가 보인다. 내가 처음 영화를 볼 때 어색하다고 느낀, 혹은 이상하다고 느낀 장면들이 그것이다. 예를 들면, 호텔비를 카드로 결제할 수 없게 된 그녀가 코트에서 꺼낸 아버지가 준 돈뭉치는 그녀가 물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물 하나 젖지 않은 상태였고, 거기에 더 앞서서 하노버에 도착한 기차는 쓰레기 정리까지 다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열차칸에서 자고 있던 옐라를 깨우지 않는다. 그리고 나중에 한 장면에서 그녀가 철도청에 전화하여 티켓을 끊으려 할 때 통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서양에서도 동양과 비슷한 '한'의 정서가 있는지는 나중에 알아보아야 하겠지만, 옐라에서 그녀가 가지고 있는 한은 '돈'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2년 전쯤에 한국에서 열렸던 '페졸트 전'에서 그와 가졌던 GV시간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 그가 한 말을 기억한다. '유령들은 살았을 적에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후회가 있는 존재들이다.' 한편, 그는 '돈'에 대해서도 이런 말을 했었다. 그가 어렸을 무렵, 아버지가 해고를 당해 집에서 쉬는 기간이 있었는데 그때 그는 그의 아버지가 너무나 무기력했다고 말했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감에 있어서 돈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고, 그리고 대부분의 사건은 돈 때문에 일어나는 것 같다라고도 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 옐라가 다리에서의 추락 이후에 겪는 많은 일들은 '돈'과 엮겨 있다. 호텔 비를 지불할 수 있었던 '젖지 않은 돈뭉치'는 자신이 물에 빠져도 '돈'만큼은 젖지 않고 효력을 다할 수 있길 바라는 그녀의 바람이 있었겠고, 영화에서 끊임없이 언급되는 2만 5천 유로의 액수와 대차대조표는 그런 의식의 총체적인 집합처럼 보인다. 


펠리컨 지역과 그 근처의 숲
동화주거지역과 색이 다른 지하철칸


잠시 하노버에 대한 이야기. 다음날 아침 나는 숙소 근처의 펠리컨 주거지역으로 향했다. 그곳은 내가 묵었던 동화 주거지역보다는 좀 더 오래되어 보였지만 높은 건물이 더 많았고, 이런저런 상가도 많아서 무언가를 하기에는 더 좋아 보였다. 그리고 이곳은 옐라의 촬영 장소이기도 했다. 정확히 영화의 어떤 부분이 여기에서 찍혔는지는 내가 자세히 알아보지 않아 몰랐지만, 아마도 짐착컨데 옐라가 처음 하노버에 도착하고 호텔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호텔로 가면서 봤었던 마당 딸린 넓은 집들이 여기에도 있었다. 그녀는 부잣집(부자가 아닐지도 모르겠다.)을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짓는다. 아마도, 고급 세단에서 내리는 남자와 그의 아내 그리고 딸을 보면서 자신의 이루어지지 않을 미래를 투영시켰을지도 모르겠다. 대략 구역을 가로지르고 난 뒤에 나는 바로 옆에 있었던 숲 지역으로 돌아갔다. 아침이라 사람이 많진 않았지만 중간중간 러닝을 하거나 라이딩을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도시에 이렇게 큰 녹지구역이 있는 독일이 부러워지는 지점이다. 어쩌면 한국은 땅이 평평하지 않아서 등산이나 하이킹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은 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곳을 평일에 갈 순 없으니 주말에 즐기는 거겠지. 나는 그렇게 아침에 두 시간 정도를 걸었고, 그 후 지하철을 타고 중앙역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는 아프가니스탄 음식점에 들어가 닭고기가 들어간 커리 하나와 흑맥주 하나를 시켜먹었다. 점심식사 시간이라 몇 유로 정도 싼 가격에 음식을 먹을 수 있었는데 밥이 정말 많이 나왔다. 그래도 나는 닭과 커리가 좀 더 많길 바랬었는데.


숙소에서 저녁에 다시 <옐라>를 시청했다. 돌아오는 길은 금방 어두워진다.


다시 스토리. 옐라는 호텔 로비에서 비즈니스 영어 책을 보고 있고, 어떤 남자가 다가와 그녀에게 묻는다. '대차대조표에 관심 있어요?' 남자는 이내 자신의 질문을 자책하지만 옐라는 오히려 '네, 관심 있어요.'라고 답한다.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남자는 옐라가 여기에 취직을 했고, 수습기간을 거친다는 것을 알아낸다. 하지만 담당자 이름을 듣고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잘해보라고 말을 한 뒤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다음날, 회사로 찾아간 옐라는 의아함을 느낀다. 회사 건물에서는 사람들이 짐을 들고 나오고, 자신을 고용한 슈미트-오토는 옐라를 불러 자기 자리에서 어떤 서류 뭉치를 가져와달라고 주문한다. 알고 보니, 이미 회사는 파산한 뒤였고, 슈미트-오토 역시 이것에 책임이 있어서 회사로 들어가지 못하는 상태였던 것이다. 한순간에 자신이 취업 사기를 당한 것을 알게 된 옐라는 그의 서류더미를 저당 잡고 자신의 일자리를 달라며 택시에 동승한다. 하지만, 남자는 본인이 옐라의 인터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어떤 직무로 지원을 했는지, 월급은 얼마를 받기로 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다시 돈을 돌려받고 뜬금없이 굴요리를 먹으러 가자고 제안한다. 그러자 앞에 있던 택시기사가 '방도 좋은 곳'이 있다며 거든다. 옐라는 그 순간 불쾌함이 극에 달아 택시 문을 열고, 그대로 내려버린다. 여기서 나는 두 가지를 느꼈다. 하나는, 남이 어떻게 되는지 상관없고 오직 자신만의 이익을 취하는 이기적인 인간상. 그리고 여성의 일에 대해서 무관심한 인간상. 그렇게 옐라의 열망-일을 한다는 것과 돈을 번다는 것-은 상상 조각나버린다. 그리고 그녀는 호텔방에 들어가 짐을 싸다 옷을 집어던지고, 그대로 울음을 터뜨리며 절망한다. 


1부 끝.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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