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FilmKarton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ripza Aug 19. 2023

다 타버린 이후에도 깨달았다면 다행인 걸까?

<Roter Himmel / Afire(어파이어) 2023> 리뷰

*해당 글엔 영화 <Roter Himmel / Afire, 2023>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저번 2월, 베를린의 겨울은 그리 춥지 않았다. 나에게는 그것이 유럽에서의 첫겨울이었지만 유난히 따뜻했던 탓에 나는 전기장판을 그리 많이 사용하지 않았고, 뉴스와 신문에서도 푸틴에게 물 먹일 수 있었다는 기사를 접했다. 정치적으로는 그랬었고, 나에게 있어서 저번 베를린 영화제는 다른 측면에서도 뜻깊었는데, 그것은 바로 페촐트의 신작인 <Roter Himmel> (독일어로는 '붉은 하늘'이라는 뜻이고, 영어 제목으로는 Afire, 한글제목도 어파이어로 확정되었다.)을 볼 수 있었음과 동시에, 경쟁작이었던 그 작품이 심사위원상 대상을 타는 장면 또한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는 최근 그의 영화를 수입했던 M&M 인터내셔널에서 9월에 그의 신작을 내보인다고 인스타그램에 광고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6월 말부터 8월 초 까지 잠시 한국에 들어가 있었는데, 그래서 내심 극장 개봉이 좀 더 빨랐으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이 영화를 영화제에서 두 번, 나중에 독일에서 개봉을 할 때 한 번, 총 세 번을 봤다. 사실 한국어 자막이 없는 탓에 좀 더 영화를 이해하려고 본 것도 있었지만, 두 번 세 번 볼수록 더 좋아졌다. 게으름으로 인해 아직 완료하지 못한 베를린영화제의 마지막 글에서 이 영화에 대한 조금은 긴 글을 쓴다고 했었는데, 오늘 그것을 실행하려 한다.


1. 기저


<Roter Himmel>의 배경을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2021년도였을까, 페촐트의 영화들이, 그러니까 <트랜싯>과 <운디네>가 예술영화 부문에서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하고 마니아들이 생겨서 바로 그다음 해에 <피닉스>도 개봉하게 되었고, 연달아 CGV에서는 감독전까지 진행하기도 했다. 그때 베를린에 있는 그가 GV를 진행했고, 그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 그가 한 다음 작품에 대한 얘기가 그랬다. "독일의 Ostsee(바다)에서 젊은 남녀들이 여름을 보내고, 그들 가슴에 있는 불과 실제 산불이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다." 나는 내심 제목이 무얼까 상상하는 한 편, 불이 퍼지고 있는 산에 이미지를 떠올렸다. 무수한 연기와 함께 생명이 모두 타 죽어가는 것일까, 아니면 자연의 섭리처럼 자연스럽게 꺼지고 다음 생명을 위한 시작을 알리는 불일까. 제목이 <Roter Himmel>이라는 것을 알았을 땐 그가 제목을 지어온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도 생각했다.


그가 이 이야기를 구상한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는, 베를린영화제에서 있었던 Pressconference에서 들을 수 있었다. 2020년 3월 그는 <Undine(운디네)>개봉 이후 파리에 갈 일정이 있었는데, 코로나로 인하여 프랑스의 한 호텔에 4주 동안 머물게 됐다고 한다. 호텔에서 머물면서 그는 이런저런 생각을 했는데, 그중 하나가 '여름과 관련된 영화'였다. 그의 생각으로는 미국의 경우 전형적인 호러영화는 산속에서 젊은이들이 놀러 가다가 차가 고장 나고, 어떤 길을 따라가다가 나온 집에 머물면서 시작된다고 했다. 또 다른 한편, 프랑스의 경우에는 2주간의 긴 여름휴가가 있고, 그들은 그 시간 동안 어떤 '인간이 되는 수업'을 받는다고 했다. 하지만 독일은? 독일에는 이런 '여름'을 다룬 영화가 별로 없었다.


그리고 그는 여름에 아내와 갔었던 터키여행을 떠올렸다고도 했다. 그의 기억으로는 터키에 산불이 났었고, 그런 이미지가 그의 머릿속에 남았다고. 한편으론 죽음의 고요(Silence of Death)를 생각했다고도 했다. 아주 소용한, 새소리조차 안나는 곳에서의 죽음. 그리고 그런 숲에서 시간을 보내는 젊은이들 (그의 친구이자 배우인 마티아스 브란트가 알려준 셰익스피어의 작품과도 관련 있는)을 상상하면서 이 영화의 각본을 썼다고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FomsPgv7CE

(영상 내용과 저의 번역으로 인한 설명이 다를 수 있습니다...)


2. 내용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작가인 레온과 베를린 미대에 진학하고 싶어 하는 펠릭스는 여름휴가를 떠난다. 그 집은 펠릭스의 엄마 소유인 곳이었는데, 둘 만 이 집을 사용할 것이라고 알고 있던 레온과 달리 그곳에는 나디야라는 다른 여자도 있었다. 레온은 다음 책을 출간하기 위해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이곳에서 완성하는 한 편, 근처 시내에서 편집자와 만나 내용 및 출간에 대해서 말할 참이었다.
그는 휴가를 보내면서 글을 완성시킬 생각이었지만, 그의 주변 환경은 그를 따라주지 않는다. 펠릭스는 자꾸 해변으로 놀러 가자고 하는 한편, 숙소에서는 남녀의 신음소리가 들리고, 나디야와 데이비드(해변에서 만난 구조대원)까지 집으로 놀러 와 저녁을 먹고 시간을 보낸다. 레온은 여기에서 거리를 두려고 하고, 짜증을 내지만, 한편으로는 거기에 끼고 싶은 마음도 있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레온과 다른 이들의 사이는 점점 틀어지기 시작하고, 편집자까지 같이 한 저녁식사자리에서 그 갈등이 (레온의 마음속에서) 절정에 이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났던 산불이 들이닥치면서 분위기는 급변되고, 레온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혼비백산 함과 동시에 어떤 좋지 않은 일을 겪게 된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여름휴가에서의 일을 소설로 다시 쓴 레온이 출판사 편집자를 만나고, 이때 다시 나디야와 마주치면서 영화는 끝난다.



3. 감상


페촐트의 영화에서는 자주 '일'과 '사랑'이 주제 중 하나로 사용된다. <바바라>에서의 주인공 바바라는 의사인데, 동독을 탈출할 기회와 의사로서의 (그리고 확장된) 사명을 다할까 고민하기도 하고, <운디네>에서도 역사학자인 운디네는 영화 초반 베를린 건축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는 한 편, 그의 연인인 크리스토프는 산업 잠수사인데, 영화의 주 무대 중 하나가 '물'인 것을 생각하면 페촐트는 그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의 직업을 십 분 이용하고 그것을 통해 '일'이라는 것에도 접근한다고 볼 수 있다.


주인공인 '레온'은 특히 페촐트 그 자신을 투영한 캐릭터라고도 말했다. 각본도 직접 쓰는 그이기에, (그리고 젊은 시절엔 영화 비평 글을 쓰기도 했다.) 위의 콘퍼런스 영상에서도 그의 삶과 레온의 삶이 겹쳐지는 지점이 있어서 좀 더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쉽다고 했다. 그리고 레온은 영화 내내 '글을 쓰는 것'만이 자신의 '고귀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붕을 고치는 일도, 설거지를 하는 일도 그에게는 글쓰기의 아랫단계에 있는 어떤 '움직임'을 뿐이라고 까지 생각된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가진 레온은 '글'을 쓰지 않거나, '예술'을 잘 모른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불친절하다. UdeKa(베를린 예술대학교)에 지원하기 위해 물과 바다를 주제로 펠릭스는 사진을 찍었는데, 그의 작품은 레온에겐 한없이 하찮게 보인다. 한편, 숙소의 청소/빨래/요리 등을 하는 나디야에게도 그는 자신이 쓴 '클럽 샌드위치'라는 두 번째 소설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코멘트를 받는 것을 거절한다.(나디야가 그것을 봐도 되냐고 물어보자, "당연히 안되지!"라는 말과 함께)



하지만 이런 관계는 시간이 지나가면서 역전된다. 자신의 소설을 체크하러 온 편집자가 펠릭스의 사진을 보며 훌륭하다고 칭찬하고, 심지어 나중에 베를린의 자신의 사무실로 찾아오면 글을 써주겠다고까지 말한다. (자신은 편집자를 만나기 힘든데) 그리고 레온의 눈에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인 줄만 알고 있었던 나디야는 사실 독일에 한 대학에서 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산불이 절정에 이르기 전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의 시를 읊으며 분위기를 띄운다.


레온은 점점 가라앉는다. 자신이 하는 '고귀한 일'인 글쓰기로 탄생한 자신의 작품은 구제불능이라는 코멘트를 받았고, 자신보다 아래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위로 올라왔으니까. 그의 자존심이 점점 지하에 닿을 때쯤, 산불이 퍼진다. 하지만 그때도 그는 운전도 하지 못하는 사람일 뿐이다. 갑자기 몸이 아파온 편집자를 병원으로 데려간 것도 나디야였다.


또 펠릭스와 데이비드는 어떤가? 레온의 관점에서 그들은 그냥 한량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남성적인 몸을 앞세워서 지붕을 고치고, (장면이 나오진 않지만) 해수욕과 섹스를 즐긴다. '설거지도, 청소도 다 일이야.' 아무것도 하지 않는 레온에게 펠릭스가 말한다. 어떻게 보면 영화 안에서 일을 하고 있는 건 레온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이다. 글을 쓴다는 핑계로 레온은 해수욕도 하지 않고, 놀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는 시종일관 잠에 들고 (한 여름밤의 꿈을 차용한 것 같다.) 그의 완성작은 볼품없다.



'사랑'이라는 주제로는 아직 확실히 모르겠다. 아마도 한국어 자막으로 영화를 봐야 구체적인 감상을 적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극 중에 나오는 세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는 서로 얽혀있다. 영화의 끝으로 가면 대략 레온과 나디야 그리고 펠릭스와 데이비드가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 커플은 산불로 인해 희생된다. 내레이션과 마찬가지로, 차를 견인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산불에 휘말려 죽은, 서로를 끌어안은 형태의 다 타버린 펠릭스와 데이비드의 주검을 보면서 레온은 폼페이 유적의 다른 시체를 상상한다. 그리고 검시관은 말한다. 불에 타고 있을 때 그들은 살아있었다,라고.


4. 마무리


지금까지 봐왔던 그의 영화와는 약간 분위기가 다른 것 같아서, 영화제에서 처음에 봤을 땐 그의 이전작품 대비 아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이런 생각과 반대로 말하는 듯, 그의 최신작은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상의 권위에 기대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그의 작품을 한국어 자막으로 봤더라면 좀 더 이해할 수 있었고, 다른 작품만큼 좋았던 것을 느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런 생각으로 두 번을 더 봤다.


어떤 영화는 두 번째 보면 첫 번째만큼 와닿지 않는 것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볼 수록 좋아진다. <Roter Himmel>이 나에겐 그랬다. 어쩌면 그의 다른 영화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는 배경음악을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고 재작년의 GV에서 말했었는데, 이번 영화의 오프닝을 접하며 그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웬일로(?) 그리 오래되지 않은 한 오스트리아 밴드의 'In my mind'가 나오는 순간 나는 그 노래를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한창 영화 제작을 하고 있을 때 이 음악을 접했다고 했는데, 듣자마자 자신의 영화와 어울린다는 것을 깨닫고 바로 사용했다고도 했다.



코로나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가 이전 작품들에 비해 사건이 일어지는 배경이 한정적이고 (별장과 바닷가 약간) 등장인물들도 많지 않았다. 그래서 약간의 허전함을 느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가 다시 가져온 '일'이라는 주제를 접하면서, 나 역시 마음 한 가슴속에 생각하고 있던 '일'의 높고 낮음에 대해 반성을 하기도 했다. '일'을 핑계 대면서, 남들과 어울리지 않고 허비했던 시간도 아쉽기도 했다.


페촐트는 레온이 두 번째로 쓴 쓰레기 같은 소설의 제목을 '클럽 샌드위치'라고 지은 이유가, 자신이 두 번째로 찍은(아마도, 장/단편 다 합쳐서) 영화 '쿠바 리브레(알코올에 콜라만 섞은)'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호텔에 들어가서 허겁지겁 끼니로, 혹은 알코올을 채우기 위해서 먹을만한 간단한 메뉴들. 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쯤에서 레온이 무언가를 깨달았다고 믿는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에서, 뒤로 빠지지 않고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그런 사람으로. 산과 들은 타버렸지만, 적절한 시간이 주어지면 거기에서 다시 새 생명이 일어서는 것처럼. 다 타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다른 시작으로 작용할 수 있다면, 그거면 됐다. ENDE


사진출처 : schramm film

매거진의 이전글 73'Berlinale : 6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