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ripza Dec 23. 2023

돌 이야기

 얼마 전에 대학시절 같이 동아리를 했던 후배 D의 첫째 딸 돌잔치가 있었다. 해외에 있는 나로서는 그것을 SNS를 통해 접했고, 메신저로 축하를 해주었다. 그리고 몇 해 전, 그의 결혼식은 부산에서 열렸고 나는 그곳에 갔다. 그즈음 나는 한창 퇴사 준비와 유학 준비를 하면서 회사에서는 절반 정도 한량처럼 보내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의 결혼식 날짜와 나의 생일 날짜는 같았고, 나는 그의 결혼식을 축하함과 동시에 푸짐한 대접을 받고(뷔페가 참 맛있었더랬다) 바닷바람을 쐬며 같이 온 다른 동아리 멤버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날짜가 완벽히 같진 않지만, D의 딸의 생일은 그때 같이 부산에 갔었던 다른 후배 H의 생일과 딱 하루 차이가 나기도 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비슷한 시공간적 주기가 같게 되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사람 간의 관계성을 더욱 짙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한 달 전쯤 나는 바이로이트 근처에서 가장 큰 도시인 뉘른베르크에 다녀왔다. 같은 과의 독일인 M은 뉘른베르크에 여자친구가 있는 터라 격주마다 그곳에 갔고, 몇 주 전 나를 비롯한 몇몇 친구들과 함께 그곳에 가서 같이 크리스마스 마켓을 즐겼다. 거기에서 나는 내가 감히 22년도의 최고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에 나오는 눈 달린 돌의 오마주처럼 보이는 기념품을 발견했고(심지어 그것은 하나가 아니라 군체 형태였다.) 처음으로 돌은 돈을 주고 사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제가 돼서야 그것을 가방에서 꺼내 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앞서 말한 D는 부산 출신은 아니었지만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는 터라 취업 후엔 늘 부산에 있었고 거기서 현재의 와이프도 만났다. 참고로 부부 모두 영화계 쪽에 종사하는 터라 돌잡이 항목 중 슬레이트(장면 촬영을 시작하기 전에 사용하는 도구)도 있었지만, 그의 딸은 무소유를 실천하며 아무것도 잡지 않았다고 했고, 나는 그 면이 묘하게 D와 닮은 구석이 있다고도 생각이 들으면서 웃었다. 어쨌든, 그의 결혼 전에 나는 자주는 아니지만 격년에 한 번 정도 바다를 보러 갔었고, 그때마다 마치 결혼식 때처럼 현지인이 알려주는 맛집에 다니며 겨울 혹은 여름의 며칠을 부산에 할애했었다.

 
 나는 영화를 무척 좋아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혹시 한국의 도시 중 어느 곳이 가장 ‘영화와 맞닿아’ 있냐고 묻는 다면, 나는 주저 없이 부산이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정작 부산국제영화제에 가본 적은 없다. 대신 영화의 전당은 몇 차례 방문했고, 그중 한 번은 거기에서 D와 홍상수의 영화도 한 번 봤다. 앞서 말한 답변과는 동떨어지는 측면으로서, 내가 정작 가본 영화제는 퇴사 후 봄에 갔었던 전주국제영화제와, 올해 초 있었던 베를린국제영화제 둘 뿐이다. 전주는 첫 영화제라 너무 좋았고, 좋은 영화와 다큐멘터리도 접할 수 있었다. 베를린은 유학 전 내가 영화를 좋아하면서 가진 꿈 중 하나인 ‘해외 국제 영화제 방문하기’를 이룰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D와 가끔 영화에 대해 말하면 그는 올해 부국제에 올 수 있냐고 물어보곤 한다. 나도 정말 갈 수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축제가 10월 초중반에 열리는 터라 이곳 독일의 개강기간과 아슬아슬하게 겹쳐서 쉽게 그 물음에 쉽게 답하지 못한다. 그것이 미안할 따름이다. 이는 베를린 영화제에도 똑같다. 한 달 반쯤 후면 74회 베를린 영화제가 시작되지만, 그때는 겨울학기의 시험이 한창이기 때문이다. 독일은 학기가 한국과 조금 다르다. 첫 학기가 10월 중순에 시작하고, 그 학기의 방학은 보통 3월이다. 한국의 2학기인 여름학기는 4월 중순에 시작해서 7월 중순쯤에 끝난다. 지금의 나는 겨울학기의 삼 분의 이쯤에 도달해 있다.
 
 올 10월, 학기가 시작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자주 ‘이름’에 관한 주제가 나왔다. 인도인 친구들 중엔 신의 이름을 딴 ‘크리슈나’도 있고, 힌디어로 ‘시’ 그 자체가 이름인 친구도 있다. 이름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중국인들과 가장 잘 통하는 편인 것 같다. 아무래도 한자 문화권에 있다 보니 이름에 대한 의미나 돌림자를 설명할 때 난이도가 낮다. 내 이름에는 그 돌림자가 ‘석錫’이다. 한자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저 석자가 돌이 아닌 주석(원소기호 Sn)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지만, 보통은 돌 석石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어렸을 때 ‘돌’과 관련된 것으로도 장난스럽게 놀림을 많이 받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상관없다. 돌은 독일어로 슈타인Stein이고, 나는 이 단어가 가진 어감이 꽤나 마음에 든다. 돌은 신비로운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 안에는 수많은 원소가 들어있다. 겨울학기 개강 전 뮌헨에 다녀왔을 때, 나는 현대미술관 맞은편에 있던 뮌헨 대학교(LMU)의 광물 분과 건물에 있던 자그마한 박물관에 갔었다. 거기에는 어두운 조명에서 빛을 발하는 형광색 돌과, 마치 꽃처럼 생긴 아름다운 결정들을 감상했다. 




 이번 학기에 듣고 있는 수업 중의 한 주제는 결정(Crystall)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보기만 해도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는 무기화합물의 층상구조와 그것을 분석할 때 사용되는 방법,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얻은 그래프와 그 그래프에 있는 수많은 곡선들이 나오고, 그것들은 나를 보며 이해해 달라는 손짓을 보낸다. 그 손짓에 의해 내가 지금까지 (최소한) 이해한 바로는, 결정들은 원자의 오비탈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이 오비탈은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은 들어본 양자역학과 관련이 있다. 과학적으로는 미시세계의 역학을 다룬 것이지만, 이것이 대중문화로 나오면 보통은 ‘슈뢰딩거의 고양이’에 얽힌 잡다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평행세계에까지 확장된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도 그랬고, 그래서 나는 그 영화를 영화적 완성도와는 별개로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다. 

 거기에선 수많은 평행세계들 중 가장 불쌍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인생(영화의 표현이라면 가장 무능력한)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배우가 아닌, 뉴욕 한복판에서 광고판을 돌리는 것도 아닌, 이주 노동자로서의 자아와 성소수자 딸을 가진 엄마로서의 자아가 혼합된 그녀는 결국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라는 가능성을 이용하여 갈등과 사건을 해결한다. 중간에 그녀와, 평생세계에서는 악당인 그녀의 딸이 돌이 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지만, 나는 그것을 영어 원어 사운드와 독일어 자막으로 보는 터라 아직 그 시퀀스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유튜브 영화에서도 독일어 자막으로 사놓았던 터라, 한국에 들어가면 한국어 자막으로 다시 볼 생각이다.

 어제부터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2주간의 크리스마스 방학이 시작됐다. 독일인 친구들은 일찌감치 목요일에 버스나 기차를 타고 독일의 다른 주로 갔다. 나와 같은 소위 ‘인터네셔널’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은 이 도시에 남거나 여행을 간다. 나도 학기 초에는 어딘가로 여행을 가리라 어렴풋이 생각을 했었다. 아직 가보지 못한 런던의 겨울을 상상했고, 혹은 비엔나에서 작년 이맘때쯤 못 가본 미술관에 들어가는 상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마도 이번 이 주간의 방학 때는 기숙사에서 조용히 휴식을 즐기며 학기 중에 배웠던 것들을 정리하고 문제를 푸는 시간을 가질 것 같다. 지금 내 앞에 놓인, 7개의 눈 달린 돌들을 바라보면서. ENDE



매거진의 이전글 23/24 겨울학기 초반 소감 (수업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