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일요일) 저녁은 오랜만에 시내에 나가서 저녁을 해결했다. 평소엔 학교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주말에는 집에서 음식을 해먹곤 하는데, 가끔 남이 해준 밥을 먹고 싶을 때가 있고, 그것이 오늘이었다. 오늘은 인도 음식점을 갔다. 10월 초 쯤에 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곳의 다른 음식점들과 다르게 내가 오늘 온 곳은 식전 빵 같은 과자같은 것을 주기도 하고, 커리를 시켰을 뿐인데도 난과 밥을 엄청 푸짐히 주는 곳이라 탄수화물을 채우기 좋은 곳이기도 했다. 양고기와 야채가 들어간 커리와 무알콜 맥주를 하나 시키고, 천천히 그것을 먹었다. 오늘은 특이하게도, 가게에서 나오는 음악이 일본 영화에서 나온 배경음악들을 인도의 전통악기(?)같은 것으로 리믹스한 것이라 재밌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기쿠지로의 여름>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 로맨스 영화 중 하나인 <무지개 여신>의 OST를 들으며 나는 식사를 마치고 나왔다.
작은 도시는 버스 배차 간격이 넓다. 식사를 끝내고 나온 것은 6시 40분이었고, 기숙사로 향하는 버스는 중앙 버스 정류장(ZOH)에서 7시 10분에 있었다. 나는 귀에 이어폰을 꼽고 30분의 시간 동안 구시가지 한 바퀴를 천천히 돌았다. 그러고도 남을 거리와 시간이다. 큰 도시의 ZOH(Zentrale Onmibus Haltstelle)는 주로 지역 간을 잇는 FlixBus나 나라 간을 잇는 버스가 오다니는, 서울로 치면 고속버스터미널 같은 곳이지만 내가 있는 작은 도시에서는 그 도시의 모든 구역으로 가는 버스가 모이는 곳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모든 사람이 모인다. 아침엔 학생들과 대학생들로 가득하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마실 나가는 동네 어르신 분들이 많다. 저녁에는 늘 지친 기색이 역력한 노동자들과 학생들을 볼 수 있다.
나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학교에 가기 때문에 이곳에 늘 하루에 두 번은 들린다. 하지만 오늘의 기록을 적는 이유는, 내가 ZOH에 도착한 순간 재생목록에서 재생된 노래 때문이다. 정확히는, 노래'들'때문이다. 첫 번째 노래는 루시드폴의 '그대 손으로'였고, 두 번째 노래는 언니네 이발관의 '깊은 한숨'이었다. '그대 손으로'는 한국 영화 <버스 정류장>의 OST곡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꽤나 좋아한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대학교 3학년 무렵 OCN에서 해주는 것을 보고 난 뒤였던 것 같다. 영화 자체는 2002년에 개봉했고, 그래서 내가 봤던 순간도 이미 영화가 나온지 십 년 쯤이 지난 뒤였을 것이다. 거기에서는 어린 김민정 배우와 김태우 배우가 나와 각각 여고생과 국어를 가르치는 학원 강사역으로 나오고, 그 둘에 대한 관계드라마가 펼쳐진다.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설정이지만, 주류가 아닌 두 주인공이 주고 받는, 지금 보면 약간은 오그라들 수도 있는 대사들이 난 좋았다.
두 번재 노래인 '깊은 한숨'은 제작년, 한창 회사에 다니고 있을 무렵 알게된 노래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좋아진'노래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언니네 이발관을 나는 오래전부터 좋아하고 있어서, 언젠가는 전체 앨범을 들으면서 들었을 테지만, 오랫동안 내가 만든 나만의 재생목록에는 없던 노래였다. 그 노래가 다시 다가온 순간은, 주말의 어느날 서울에서 수원으로 가는 빨간버스를 타고 정류장에서 내린 뒤였다. 그때 당시의 나는 관심이 가는 사람은 있었지만 굳이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진 않을 때였고, 다른 한 편으로는 전 연인에 대한 기억이 이따금씩 떠오를 때였다. 정확히 말하면, 이미 헤어진 지 2년이 되어갔을 때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여운이 남아있었다고 해야할까. 하지만 그 날 밤, 자취방으로 가는 길에 그 노래와 그 노래의 가사를 되새기면서 홀연히, 그리고 약간은 구슬픈 마음으로 여운을 씻을 수 있었다. 그 기분은 뭐랄까, 상쾌함도 아니고 체념도 아니었다. '받아들임'에 가장 가까웠다고 말하는게 가장 맞는 것 같다.
사실 전 연인과 관련해서는 버스 정류장에 대한 기억이 하나 있다. 중간의 다툼으로 인해 잠시 헤어지고 있었던 때, 나는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끊임없이 그 선택에 대해 고민했고 한숨을 쉬었었다. 그러다가 종단에는 그가 다시 보고 싶고, 다시 봐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연락을 하기로 마음먹었고, 퇴근 시간이 조금 넘은 애매한 시간에 나와, 다른 사람들이 줄을 서기전에 회사 셔틀 버스 정류장 뒤의 공간에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통화를 했었다. 그렇게 며칠 후 그와 나는 다시 만났지만, 결국엔 8개월 쯤이 지난 뒤에 다시 헤어졌다. 그런점에서 내가 '깊은 한숨'을 들었던 시간대는 오묘했다. 전 연인을 처음 알고나서 사귀고, 헤어질 때 까지의 시간이 약 이 년이었고, 헤어짐 이후 수원의 한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에 그 노래를 들은 것도 거의 이 년이 되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버스 정류장이라는 공간은 나에게 있어서 만남이나 재회의 공간임과 동시에 퇴장과 헤어짐의 공간이기도 했던 거다. 누군가는 거기에서 버스에 타고, 누군가는 내린다. 정류장이라는 공간은 기다림이기도 하지만, 다른 공간으로 가기 위한 이동이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버스 정류장에 있다. 몇 번 버스를 타고 내렸던 적은 있지만, 내리지 않고 탈 버스를, 시간표에서는 찾지 못한 것 같다. 요즈음, 주변 지인들의 결혼 소식이 많이 들린다. 해외에 있는 터라 참석을 못해 아쉬움 점도 있으면서도, 그들은 그들의 버스를 찾아 타는 것 같아 대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러워질 때도 있다. 어쩌면 누군가와 가족이 된다는 것은 버스를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차를 준비한 뒤 같이 운전하며 목적지를 정해놓지 않은 채 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고보면, 나는 버스를 탈 때 어느정도는 목적지를 정해놓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내가 생각한 목적지로 가지 않는 다고 생각되면 부저를 누르거나, 아예 버스에 올라타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기숙사로 향하는 버스가 도착했고, 나는 거기에 올라탔다. 목적지의 정류장에서는 나와 같은 기숙사에 사는 것 같은, 혹은 그 주변에 사는 주민들 몇몇이 내렸고, 이미 어두워진 왕복 6차선 도로를 가로질러 맞은 편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