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ripza Apr 22. 2024

단지 지구-내전 일 뿐

대학교 식당인 멘자(Mensa)에서 나는 주로 점심을 먹는다. 집에서 나오기 전에 핸드폰으로 메뉴를 확인하곤 하는데, 식당에서 꼭 지켜지는 철칙 같은 것이 있다면 비건 메뉴가 꼭 한 가지는 들어있다는 것이다. (메인 식당 세 개 중 하나, 서브 시당에서 두 개 중 하나 비율정도) 이외에도 채식을 하고 싶거나 가볍게 점심을 먹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샐러드 바도 있다. 다른 한 편, SNS에서는 육식을 강조하는 영상이나 쇼트들이 자주 올라오곤 한다. 혼자는 절대로 못 먹을 만큼의 고기에 온갖 소스와 향료를 올리고 굽는다. 그리고 선 빵 사이에 그것들을 욱여넣은 뒤에 햄버거 두께의 두 세배가 되는 그것을 게걸스럽게 한 입 베어 먹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는 스포츠 영상들이 뒤를 잇는다. 현란한 개인기로 상대 진영을 뚫고 나아가는 선수들. 그리고 골을 넣으면 환호하는 감독과 관중들. 나는 두 가지 사이에서 묘하게 비슷한 감정을 받았다. 


 그것은 바로 ‘젊은 존재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이었다. 스포츠도 당연히 산업이다. 전 세계적 경향을 보면 스포츠는 잘 팔리는 산업이다. 수천만 명이 경기들-주로 유럽이나 미국에서 다른 대륙으로 송출되는-을 지켜본다. 축구(미식축구를 포함한)와 야구, 농구 같은 스포츠를 하는 프로 선수들의 나이는 대략 1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 정도다. 40대 초반까지 이어가는 사람들도 근근이 있으나 이들은 아웃라이너이므로 더 언급하지는 않겠다. 


 그들은 ‘프로’로서 그가 뛰는 팀에 의해 ‘고용’된 존재들이다. 팀은 ‘운영’된다. 선수들은 감독과 코치들이 관리하는 한편, 팀은 그 팀에 소속된 직원들과 단장들에 의해 운영된다. 더 위엔 보드진이나 모기업이 있고, 국가단위에서는 협회 또한 존재한다. 그들은 운영 측에 의해 ‘부려’ 진다. 젖 먹을 힘까지 다 짜내 뛸 것을 강요당한다. 이렇게 젊은 시절 기력을 소모한 그들은, 연골조직이나 관절들이 다 닳아 있기 부지기수다. 은퇴한 축구선수들의 최근모습들을 보면 몸무게가 불어 있는 경우도 많다. 미식축구의 경우 잦은 몸싸움과 박치기로 인해 보통 사람들보다 뇌 쪽에 관련된 질병으로 죽을 확률이 훨씬 높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사람들에게 소비되는 고기종류도 마찬가지다. 소(20년/5년/25%)와 돼지(15년/6개월/3%) 그리고 닭(8년/1달/1%) 같은 가축들은 보통 자연적 수명보다 훨씬 일찍 도축된다. *(자연수명/도축수명/%) 동물들의 경우가 사람보다 더 가혹하다. 독일에서는 생산된 육류제품들의 점수를 그들이 자라진 환경에 따라 점수를 매기기도 하겠지만, 도축되고 생명을 마감한다는 것에서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런 ‘젊은것’들의 죽음은 인간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전쟁이 그렇다. 


 전쟁에서는 ‘돌격’할 수 있고 ‘재빠른’ 몸놀림을 보이는 ‘젊은’ 존재가 필요하다. 전쟁영화를 보면 전장을 뛰어다니는 것은 젊은 병사들이며(<1917>), 배가 불룩 히 나온 장교들은 안전한 벙커 안에서 느긋하게 때론 급박하게 담배를 피우며 자신들의 체스말을 다음에 어디 둘지 생각한다. (<다키스트 아워>) 이런 점에서 스포츠와 전쟁은 비슷한 운영양상을 띤다. 은퇴(전사) 후에는 다른 사람으로 다시 채워진다. 근 3년간 지구상에서 벌어진 ‘잘 알려진’ 전쟁들을 보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보듯이, 징병되는 것은 보통 젊은 남자들이다. 그들이 다 소모되면 징집 나이는 올라간다. 두 나라의 전쟁으로 양 쪽을 합해 보수적인 접근으로 1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남녀를 막론하고 이러한 희생은 동력을 잃는 계기가 된다. 남성들은 전쟁터에서 사라지고, 남겨진 여성들은 국가에 의해 ‘인구적 측면’과 ‘사회 영속성’을 근거로 한 출산을 강요받고 추가적인 노동을 하는 위험에 처할 것이다. 전쟁은 단지 지구-내전일 뿐이다. 하지만 모든 과거의 내전들이 그랬듯, 동종 간에 일어지는 행위들은 때로는 이종(異種) 간에 일어나는 행동들보다 더욱 잔혹하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의 젊은 존재들은 사회적으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이전 세대의 빚을 넘겨주기 위해 언론은 ‘마지막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패닉바잉을 주도했고, 그 결과 이루어진 것들은 수많은 전세사기와 이율상승으로 인한 파산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젊은 존재들은 인구적 파산을 외치고 있다. 늙은 이들에게 종사하는 대신 현재의 자신의 삶을 즐긴다. 오지도 않을 미래의 불안감에 떠는 대신, 스스로가 멸종의 길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전 세계의 정치상황을 보았을 때도 별반 다르지 않다. 당장 전쟁위기를 주도하면서 국내에서의 자신의 위상을 굳건히 하려는 자들을 보라. 그들은 자신을 위해 필요하다면 기꺼이 젊은 존재들을 전쟁터로 밀어 넣으며 살해하고 다른 한편으론 또 다른 ‘전쟁 세대’를 생산해 낼 것이다. 어쩌면 냉전 이후 몇 년 전까지가 인류 역사상에는 다시없을 평화의 시대일지도 모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2와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