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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ripza Feb 06. 2017

전자 사냥

4차 산업혁명은 인터넷 상에서 시작된 지 오래다.

컴퓨터를 새로 샀다. 짐을 뒤지다가 오래전에 산 스타크래프트 1 시디와 디아블로 2 시디를 찾았다. 요새는 게임도 시디가 필요 없이 시디키만 등록하면 다운받아서 즐길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십여 년 만에 디아블로2를 집에서 실행했다.(3년 전 부산여행을 갔을 때 시간 때울 겸 새벽에 피시방에 들어가 두 시간을 한 게 마지막이었다.) Asia 1,2,3로 나누어져 있던 서버는 Asia로 통합되어 있었다. 나는 팔라딘을 골라 키웠다. 안다리엘과 두리엘을 죽이고 액트3로 넘어갈 시점에 더딤을 느꼈고, 나는 남은 액트를 깨 주는 버스 방에 들어갔다. 사람들은 대부분 친절했지만 아닐 때도 있었다. 잘 모르는 이에게 다그치기도 하고, 짜증을 부리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그런 광경(?)들을 지켜보며 무사히 마지막 난이도까지 깨는 데 성공했다. 



그 뒤로는 디아와 바알만 잡고 다음 방으로 넘어가는 ‘노가다 방’에 들어갔다. 레벨도 빠르게 올릴 수 있고 운이 좋으면 아이템도 주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방을 움직이는 소위 ‘기사’들은 이미 좋은 아이템을 장착하고 있어 아주 빠르게 사냥을 했다. 나는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들은 어느 시점마다 “디아블로 잡아용~”이라거나 “바알 탄핵하러 ㄱㄱ”라는 말을 채팅창에 쳤고, 저렙들이 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지금 포탈 타고 오면 위험합니다.”라는 문구도 지속적으로 올렸다. 처음에는 고수들이 채팅 매크로를 쓰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에게 무언가를 물어봐도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매번 방을 들어갈 때마다 패턴이 모두 같았다. 그들은 모두 봇(BOT)이었던 거였다. 나는 실소를 뿜었다. 내가 지금까지 사람이라고 쫓아다녔던 캐릭터가 모두 봇이었다니. 나중에 찾아보니 디아블로2는 이미 봇들이 많이 점령한 상태고, 특히 중국 쪽에서 공장처럼 돌리고 있다고도 했다. 봇은 스스로 방을 만들고 주어진 메커니즘에 따라 사냥을 했다. 매번 똑같은 루트로, 같은 스킬을 써서 메피스토와 디아블로, 그리고 바알. 이 악마 삼 형제를 10분마다 한 번 씩 삭제했다. 



봇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치지 않았다. ‘노가다’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RPG 게임이란 것이 그렇듯이. 아이템을 드랍하는 것은 ‘확률 싸움’이기 때문에 좋은 아이템을 얻기 위해서는 무한반복과도 같은 사냥이 필수적이다.(그렇기 때문에 나는 RPG 장르를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은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사냥을 하다가 부주의로 인해 캐릭터가 사망할 수도 있고, 수십 판을 하다 보면 질려서 잠이 오기도 한다. 하지만 봇은 아니다. 그들은 체력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전기에너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늘 같은 상태로 사냥을 하고, 그들의 주인에게 시간만 주어준다면 좋은 아이템을 인벤토리에 가득 채워준다. 게임을 잘하는 사람에게 몇 만 원을 주고 대리를 맡기는 것보다, 봇 프로그램을 써서 혼자 돌리는 게 더욱 이득인 것이다. 



사람들은 4차 산업혁명이 불러올 미래를 걱정하곤 한다. 일자리가 없어지고, 우리의 삶이 더 황폐해지는 건 아닐까. 하지만 나는 우리가 기술을 올바르게 사용하고 적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디아블로2의 봇이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자신을 설치한 게이머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듯, 우리도 목적성에 맞게 봇을 삶 곳곳에 배치한다면 거기에서 오는 이득(혹은 편안함)은 지금과는 상상도 되지 않을 만큼 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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