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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ripza Apr 05. 2017

우연의 남발

-내 귀에 도청장치가 들어있다.

나는 드라마를 자주 보는 편은 아니지만, 마음에 드는 것이 생기면 챙겨보는 편이다. 과거에 <가족끼리 왜 이래>가 그랬고, 몇 달 전 종영된 <역도요정 김복주>가 그랬다. 사실 집에서도 거실을 기웃기웃하며 부모님과 동생이 보는 드라마를 흘깃흘깃 봤다. 


<가족끼리 왜이래>의 한 장면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한국 드라마는 막장화가 됐다. 같은 시간대에 하는 드라마를 이기기 위해서는 배우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 많은 작가들이 선택한 것은 ‘자극적인’ 소재나 내용 전개였다. 현실에서 있을 법하지도 않은 일들이 연속으로 일어나면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사람들은 그것에 빠져들었다. 생활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드라마를 보면서 풀기 시작한 것이다. ‘저 나쁜 놈’ ‘망할 년’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향해 실존하지도 않는 주인공 혹은 조연을 보며 감정을 쏟아냈다. 



그러다 보니 거의 모든 드라마가 비슷한 서사구조를 취하고 캐릭터끼리 엮이는 관계마저 비슷해졌다. 알고 보니 누구의 자식이란다. 겹사돈은 기본이고, 어떤 드라마는 원수끼리 한 집에 시집을 가고, 원수의 부모님끼리 연정을 품는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막장 드라마’그 자체가 아니라 드라마 속에서 보이는 ‘장치’다.



막장이든 아니든 한국 드라마에서는 ‘엿보기’가 지나치게 많이 등장한다. <가족끼리 왜 이래>에서 김현주는 아버지 유동근의 암을 담벼락 너머에서 ‘엿듣기’를 하며 알게 되며, <역도요정 김복주>에서는 이성경과 방을 같이 쓰던 경수진이 복주의 가방을 뒤져서 그녀가 ‘비만클리닉’에 다니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아버지의 병을 알게 되고 나서 딸이 보이는 슬픔과 이후 화해하는 장면은 나에게도 먹먹함과 울컥함을 가져가 주었고 장면 또한 너무나 좋았다. 




그러나 이것이 왜 문제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어본다면 그 답은 간단하다. 주인공들의 저런 행위가 개연성 측면에서 바라봤을 때 너무나 쉽게 서사와 갈등을 만들어가 해결하기 때문이다. ‘우연한’ 시간에 ‘우연히’ 그곳에 있어서 ‘우연히’ 상대방이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는 것은 현실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이 우연한 ‘엿보기’가 서사의 중대한 터닝 포인트를 가져오거나 선행 분규로 쓰인다. 이러한 장치들이 많아질수록 서사가 ‘허술하다.’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게 된다. 더군다나 드라마는 ‘우리네 사는 이야기’ 아닌가. 



다른 한 가지 측면은 이러한 ‘엿보기’ 행태에서 드러나는 사회의 인식이다. 과학적 사고관으로 생각할 때 가장 빈약한 근거의 형태는 사람의 행하는 ‘발화’다. 어디에서 듣고 본 것을 가져와서 말하는 것. 인간의 기억은 믿을 것이 못되고, 귀와 눈은 ‘사실’을 그대로 가져오기에는 다른 기계장치보다 부족하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과 드라마에서 하루 종일 그런 발화들을 담고, 그것에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정보들을 들을 때 상대방에 대한 ‘믿음’과는 별개로 ‘경계’하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21세기는 거짓 뉴스가 판치고 ‘탈진실’이 득세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좀 더 자극적인 것, 좀 더 내 마음에 맞는 것만 믿으려 하고 듣고 싶어 한다. 이는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다. 주인공들은 너무나 쉽게 자신이 ‘엿보기/엿듣기’ 한 것을 믿고 갈등을 만들거나 없애고 그 정보를 진실이라 믿는다. 


사진출처 : 연합뉴스


그러니, 거짓 뉴스를 판별해내고 드라마의 질 또한 높이려면 ‘우연성’이라는 말로 범벅된 얄팍한 장막 뒤를 바라보아야 한다. 몇 달 전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청문회에서 내가 본 것도 이런 ‘우연성’이라는 빛 좋은 변명으로 쌓인 추악한 본모습이었다. 그들은 이제와 그때 말했던 것이 거짓증언이었다며 죄를 인정할 테니 뻔뻔히 정상참작을 해달라는 말을 한다. 우리의 삶이 이런 ‘막장’으로 치닫기 전에 정보의 진실성을 분간해내는 기술과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 삶과 가장 맞닫아 있는 것 중 하나인 드라마부터 달라져야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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