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 함께 있으니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야.
*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그을린 사랑>은 올림픽공원 내에 있는 K아트홀에서 열렸다. 지하철을 타고 갔는데, 올림픽공원역은 처음이었다. 공원 맞은편에는 올림픽 상가가 있었는데, 마치 1988년의 흔적을 보는 것 같았다. 이전에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1층에 여러 식당과 카페가 들어가 있었고,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이 잠시 들리는 것 같았다. 상가는 마치 활처럼 휜 채로 반원 모양이었는데, 그 덕분에 가운데가 탁 트인 광장처럼 느껴졌다.
-. 도로 사정 때문이었는지 연극이 오 분 늦게 시작됐다. 무대는 옥타곤 모양이었고, 1층에 위치했다. 무대 뒤쪽은 빛이 그대로 들어오는 창이 있었고 암막커튼이 가운데 좁은 부분만 남기고 쳐져 있었다. 공연 시작 전에 한 배우가 무대로 올라와서 창 쪽을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들어갔다.
-. 이미 드네 빌뇌브의 동명 영화를 봤고, 때문에 내용을 다 알고 있었지만 연극에서는 이 스토리를 어떻게 풀어갈지가 궁금했다. 같은 텍스트를 다양한 매체로 접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 초반 공증인의 독백이 인상 깊었는데,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었다. ‘새들을 보는 것과는 다르게 죽음을 대하는 것은 쉽지 않다.’
-. 주인공 나왈의 쌍둥이 잔느와 시몽이 있는데, 여자이자 누나인 잔느는 영화와 동일하게 수학자로 나왔다. 남동생인 시몽은 권투선수로 나왔는데, 영화와 비교했을 때 좀 더 문제아 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도 겉으로는 센척하지만 계속 신경 쓰는 모습을 보여서 더 입체적이었다.
-. 연극의 서사는 영화와 비슷하게 진행됐다. 나왈이 죽은 현재에서 쌍둥이가 나왈을 추적하고, 과거에서는 나왈이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 두 시점이 서로 대치하며 합일에 이르는, 긴 여정을 잘 표현했다고 생각했다.
-. 연극이라는 무대는 제한적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제한된 공간과 리소스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야 한다. <그을린 사랑>은 이 부분을 효과적으로 해냈다고 생각했다. 나왈이 고향에서 자신의 첫아들을 낳고 나서, 그 아들을 뺏겼을 때 문으로 쓰인 책상 밑에서 얼굴이 바닥을 향하고 엎질러진 모습은 바로 다음 장면에서 장례식으로 표현된다. 이때 문은 또 한 번 관 뚜껑으로 변하고, 나왈의 자세는 그녀가 유언장으로 쓴 내용과 같다. (나를 묻을 때 얼굴이 땅을 향하도록 묻어라.)
또한, 쌍둥이와 공증인이 공사 현장에서 들었던 시끄러운 공사장 소리는 바로 다음 장면에서는 과거의 나왈이 타려고 했던 난민 버스를 민병대가 총으로 쏘는 것으로 변환된다. 시각과 청각적으로 병합할 수 있는 것을 묶어 자연스럽게 장면 전환을 한 것이 좋았다.
-. 영화는 재미있는 장면이 없었지만, 연극은 한 배우가 그것을 담당했다. 영화에 있어서도 배역 차이가 있는 부분이었는데, 나왈이 입을 열지 않고 병원에 입원했던 시절 간호사로 일했던 역할을 맡은 이였다. 연극에서는 간호사를 그만두고 극장에서 일한다는 컨셉이었고, 무대 장면 전환이 이루어지는 장면에서 태연하게 책상을 치우다가 배우가 합을 맞추었다.
연극 배우는 잘 모르지만, 그 특유의 말투와 행동이 나를 포함한 다른 관객들도 웃게 했다. 나왈의 과거에서는 그녀를 위협하는 반란군이었다가 현재로 장면이 바뀌면서는 내전 시절 지어진 감옥을 설명하는 가이드로 태연하게 변신했다.
-. 잔느가 수학자인 것이 두드러지는 장면이 많았다. 사람 간의 관계를 다면체에 비유한 장면, 답을 찾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엄마의 문제에 부딪치는 모습이 보였다.
한편, 72라는 숫자도 중요했다. 극 중에서는 나왈이 민병대 우두머리를 살해하고 나서 감옥에 들어갔을 때의 죄수번호였다. 72를 소인수 분해를 하면 2의 3승과 3의 2승의 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2와 3이라는 숫자는 <그을린 사랑>에서 무수히 많은 의미로 대응될 수 있다.
나왈과 쌍둥이의 가족사는 2세대인 동시에 3세대이다. / 그리고 그을린 사랑은 세 사람이 이야기이기도 하다. 엄마와 쌍둥이, 남편과 아내와 아들, 그리고 세 남매. / 2는 또한 쌍둥이를 의미하고, 내전에서 대립한 민병대와 난민 그룹을 상징한다. 또한 나왈은 두 번의 출생을 했고, 아들을 찾기 위해 고향 친구와 둘이서 여정을 떠난다. 그리고 민병대 우두머리를 죽일 때도 단 두 발의 총알만을 사용했다.
-. 내전의 고통이 인물들에게 전파되면서 상상할 수 없이 깊은 상처를 보여준다. 난민과 민병대가 계속해서 부딪치면서 서로에게 복수를 하고 죽이는 것들이 반복되던 날들. 계속되는 고통의 고리를 보여준다. 이것을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한편, 전쟁으로 인한 개개인의 고통이 모두 합쳐지면 그것은 그저 전쟁으로 인한 결과물이라고 너무 쉽게 치부되는 것 같음을 현실에서도 느꼈다.
-. 드네 빌뇌브의 영화와 다른 점에 대해 말해보자면,
우선 공증인의 중요성이 높아졌다. 영화에서 나왈과 아이들을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이었다면 연극에서는 한 발 더 앞서가서 상당히 많은 대사를 하며 가까운 이를 잃은 중년의 모습을 보여줬다.
또한 연극에서는 나왈과 같이 여정을 떠났던 친구도 비중이 늘었다. ‘사우다’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는 나왈에게 쓰는 법과 읽는 법을 배우고 그녀 옆에서 노래를 부른다. 여기에서 약간의 트릭도 있는데, 감옥에서 ‘노래하는 여자’를 그녀로 생각하게끔 하는 장치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큰 차이는 니하드(아부 타렉), 즉 나왈의 아들이 캐나다에서 사는 방식이었다. 영화에서는 고문기술자로 활동하다가 이름을 바꾸고 캐나다로 이주하여 나왈의 동네에 살고 있었지만, 연극에서는 전쟁 중 고문 및 강간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다.
그리고 나왈이 그 재판에서 증인으로 증언할 때 그녀가 느꼈을 분노와 고통이 얼마나 깊었는지, 동시에 그 말을 자신이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랑한다고 했었던 아들에게 하는 말일 때 그 비극성과 아이러니는 극에 치닫는다.
-. Wajdi Mouawad의 원작 희곡인 Incendies(화염)의 제목에 대해 생각해보면, 화염이라는 것은 불보다 더욱 상한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나왈과 그 주변인들을 둘러싼 화염은 전염되고 폭발한다. 진실을 알았을 때 그들을 찾아온 침묵과 그 침묵을 끊었음을 알려주는 결과물인 눈물이 그 화염을 소화시켜줄 수 있었을까.
-. 연극을 본 날은 매우 무더운 날씨였는데, 재밌게도 영화를 보는 중간 소나기가 쏟아졌다. 창 밖에서 공원을 걷고 있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기도 했고, 일부는 비를 피하려 무대 쪽으로 다가왔다가, 여기서 지금 무얼 하나 신기하게 쳐다봤다. 그러면 건물 안에 있는 관객들은 또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비록 원작 희극과 연극은 허구지만, 그날 쏟아진 소나기는 그 화염을 잠재우고 나왈을 달래주기 위한 것처럼 느껴졌다. ENDE
연극 사진 출처 : http://withinnews.co.kr/news/view.html?section=134&category=137&no=193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