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이 바다를 기억할까?
설악산 기슭에서 국도를 타고 약 40분 정도를 달려 속초 시내로 들어갔다. 청초호를 왼편으로 속초해변으로 향하는 길은 낮고 두터운 구름 탓인지 가라앉아 있었다. 시내에서 사람은 구경하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연휴가 시작되는 시기인지라 꽤나 많은 차들이 도로에 나와 있었다. 속초해변으로 들어가기 직전 내비게이션의 안내와 실제 교차로가 미묘하게 달라 나는 길을 잘못 들었다. 거리감이 부족한 것인지 내비게이션의 문제인지 나는 길을 엉뚱하게 해석하는 경우가 있었다. 운전 초창기 30분 정도 떨어진 거리의 대형마트를 갈 때 세 번이나 길을 잘못 들어 고초를 겪은 적도 있었다. 다행히 교차로를 지나자 바로 유턴 구간이 나와 다시 허겁지겁 되돌아올 수 있었다. 속초해변으로 들어가자마자 대관람차 속초아이가 우리를 맞이하였다. 해변으로 향하는 공용주차장은 차들로 가득 차 있었고 사람이 거의 눈에 안 띄던 시내와는 다르게 속초해변에는 장마 기간을 무색하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뜨거운 태양이 내려쬐진 않았지만 북적이는 사람들은 휴가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이틀간 묵을 숙소에는 대략 3~4층 정도 되는 지하주차장이 있었지만, 웬걸, 주차장은 거의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지하로 한없이 내려가 겨우 기둥과 대형 밴 사이 좁은 공간을 찾을 수 있었다. 주차 공간은 또 왜 이렇게 작은 건지. 나 혼자 이리저리 각을 재다가 결국 아내가 차에서 내려 뒤를 봐주었다. 아내의 지시에 따라 겨우 동뿡이를 주차하고 아이를 조심스럽게 내렸다. 공간이 너무 좁아서 기둥을 뒤로 돌아 반대편으로 나와야만 했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캐리어와 다른 짐을 챙겨 엘리베이터로 이동했다. 1층에 작은 데스크를 찾아 체크인을 물었다. 얼리체크인은 30분 정도 뒤에나 가능하다고 하여 짐을 맡기고 아내와 아이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숙소 앞으로 좁은 도로와 인도가 있었고 도로를 지나면 속초해변으로 통하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아내와 나는 유모차에 앉아 있는 아이에게 호들갑을 떨며 바다를 소개했다. 지난 5월 영종도에서 인천부두에 가로막힌 황해를 보여주며 느꼈던 아쉬움은 뻥 뚫린 동해(East Sea)로 달래지는 듯했다.
수평선을 중심으로 바다와 구름은 가로로 접은 데칼코마니처럼 푸르스름한 회색빛을 띄고 있었다. 다만 바다는 하늘보다 더욱 역동적으로 파도와 물결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선선한 바람의 선율과 함께 우리 주변을 지나가는 관광객의 소음은 풍성한 파도소리와 어울려 휴가의 여유와 분주함을 동시에 들려주고 있었다. 여유로움과 분주함? 형용모순적이지만 어쩌랴. 그런 게 여행이고 그런 게 세상인걸. 모래사장 옆을 지나는 보도블록은 당연하게도 모래로 뒤덮여 있었고 그 위를 지나는 유모차의 네 바퀴는 ‘자르르르’하는 소리를 내었다. 아이의 생각을 읽을 수야 없겠지만 분명 엄청난 풍경과 수많은 사람의 생경함에 호기심과 당황함을 동시에 가졌으리라. 이 풍경을 보여주는 것 자체로 나와 아내는 보람을 느꼈다.
문뜩 궁금했다. 아이가 보다 성장했을 때 이 장면을 추억할 수 있을까? 여행을 다녀온 지 약 한 달이 지난 지금은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잠을 재울 때 아이는 꼭 나나 아내에게 “아빠가/엄마가 얘기해 줘.”라고 말하며 자장이야기?를 요청한다. 그때 간혹 속초여행을 이야기하면서 속초아이라던가 바다를 기억하는지 물으면 기억난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들이밀지 않더라도 청소년기나 성년이 되었을 때 대략 5살 이전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아마 우리 아이가 보다 나이가 들었을 때는 스스로 보고 듣고 냄새 맡았던 것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나와 아내의 이야기로, 함께 찍은 사진과 영상으로, 그리고 꺼내오진 못하겠지만 아이의 무의식 저편에 남아있을 아련함 정도만으로도 괜찮다.
우리는 얼리체크인을 하고 배정된 숙소로 갔다. 6층에 위치한 작은 원룸 형태의 방으로 아쉽게도 바다가 보이는 풍경은 아니었지만 깔끔했다. 간단히 휴식을 취하고 아이에게 간식도 준 후에 우리는 돗자리와 모래놀이 장난감 등을 챙겨 밖으로 다시 나왔다. 아이의 발을 파도에 담가주고 싶던 나는 모래사장에 도착하여 돗자리를 펴자마자 아이와 함께 파도가 밀려오는 해변으로 다가갔다. 아이는 물이 무서웠는지 선뜻 다가서지 못했다. 나는 파도가 떠나간 틈을 타 아이와 두세 걸음 정도 더 물가로 나왔다. 그러자 곧 파도가 다시 밀려왔고 처음 바닷물을 느낀 아이는 화들짝 놀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나 역시도 생각보다 차가운 온도에 깜짝 놀랐다. 발이 젖은 아이는 울상을 지으며 나를 향해 두 팔을 뻗었고 나는 아이를 안았다. 혹독한 신고식을 치른 탓일까? 아이는 다시는 바다에 발을 담그려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돗자리로 돌아왔다. 바다에서 멀어지자 아이는 흐느낌을 멈췄고 모래에 호기심을 보였다.
알록달록한 꽃게, 물고기, 거북이 모양의 틀과 작은 새우? 모양의 삽으로 아이는 모래를 퍼담고 틀로 모양을 만들며 놀았다. 아내는 그런 아이와 함께 놀아주었고 나는? 나는 옆에 앉아 두꺼비 집을 짓고 언덕을 쌓고 구멍을 파고... 아내는 내가 더 신났다며 놀려댔다. 평소 놀이터 모래가 더럽다는 소문을 많이 들어 한 번도 모래놀이를 시키지 못하였는데. 아이는 모래의 까끌까끌함이 즐거웠나 보다. 이마에도 턱에도 모래를 묻혔다. 아담한 손으로 모래를 한 움큼 쥐어 엄마에게 뿌리기도 하였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 아이를 씻기니 이미 저녁시간이 되어 있었다. 아내의 언니가 추천해 준 막국수 집은 숙소에서 대략 10분 거리였다. 내비게이션을 더듬으며 천천히 낯선 길을 지나 우리는 찾아둔 식당에 도착했다. 다행히 테이블은 많이 비어 있었고 에어컨에서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감자전과 동치미 막국수, 명태회비빔막국수를 주문하였다. 먼저 나온 감자전은 맛깔난 모습만큼이나 빠삭, 쫄깃, 고소했다. 뒤이어 나온 막국수는 아내의 언니가 해준 조언에 따라 적당량의 설탕과 식초, 겨자를 둘렀다. 명태회는 달콤한 양념과 부드러운 식감으로 기대 이상으로 너무나 맛있었다. 애초에 막국수를 좋아하던 아내도 칭찬을 이어나갔다. 아이는 차가운 음식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 막국수는 거들떠도 안 보고 주구장창 감자전에만 젓가락을 가져갔다. 식사가 끝날 무렵의 반응으로 보아 아마 마지막에는 느끼했으리라...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다시 숙소로 돌아온 우리 셋은 퍼졌다. 평소 1시간 30분에서 2시간을 꼭 자야 하는 아이는 오늘 차에서만 잠깐 쪽잠을 잤다. 아내와 나는 피곤한 몸을 움직여 이불을 깔고 잠자리를 준비했다. 우리 집에는 티브이가 없는데, 그래서 아이는 티브이가 있는 곳에서도 깊게 몰입하지는 않는다. 적당한 프로그램을 적당한 볼륨으로 틀어 놓으니 아이는 뒹굴거리다가 화면을 보다가 엄마를 찾다가 이내 잠이 들었다. 내가 스르르 잠에 취할 무렵 아내가 산책을 다녀오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나는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내 스마트폰에는 예쁜 바다 야경 사진이 도착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