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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댄스댄스댄스 Sep 03. 2023

속초여행 2일-1

잘 키운 게 아니라 스스로 잘 큰다.


아이는 보통 오전 6시에서 7시 사이에 깬다. 어제저녁 8시가 조금 넘어 잠들었지만 여행 중에도 이 규칙성은 깨지지 않았다. 아주 거칠게 표현하면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은 '낯선 곳에서의 육아'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를 챙겨야 한다는 점은 집에서나 여행지에서나 바뀌지 않는다. 평소와 같이 기저귀를 갈고 집에서 가져온 옥수수를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였다. 티브이에서 아이가 좋아할 만한 3D애니메이션을 보여주니 관심을 가졌다. 그 사이 일찍 일어난 아내와 나는 조금은 여유 있게 외출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속초중앙시장은 숙소에서 대략 10여 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원래는 유모차를 챙겨 택시를 타고 시장으로 이동하려 했었다. 하지만 어제저녁에 차를 타고 잠깐 식사하러 나갔을 때 생각보다 한적했었단 기억에 우리는 동뿡이를 타고 가기로 결정했다. 숙소를 나오자마자 작은 빗방울 몇 개가 앞유리에 떨어졌다. 아. 오늘은 비가 올 건가? 출발 전에 확인한 일기예보에서는 비가 올 확률이 극히 희박했는데 그래도 올 건 올 건가 보다. 아주 세찬 비만 아니라면 우리는 계획한 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대략 9시 즈음 속초중앙시장 근처 공용주차장은 거의 가득 차 있었다. 다행히 입구에서 먼 쪽에 자리가 있어 무사히 주차할 수 있었다. 아이를 유모차에 앉히고 아이가 좋아하는 우산을 하나 쥐어 주었다. 약간 탁한 주황색과 흰색이 교차하며 살 중간에 뾰쪽한 귀가 두 개 달린 우산이었다. 아직 27개월 밖에 안 된 아기는 그래도, 두 손으로 거뜬히 작은 우산 하나를 들었다. 나는 유모차를 밀고 아내는 우산을 함께 쓰고 횡단보도를 건너 시장 입구로 들어섰다. 아직 오전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문을 열지 않은 곳이 많았다. 드문 드문 가게를 열고 장사를 준비하고 있는 상인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웬걸? 최근 줄을 서서 사 먹는다고 알려진 유명한 술빵집 앞은 한산했다. 대략 다섯 명 정도 만이 줄을 서 있었다. 의도치 않게 오픈런을 한 것이다. 막 첫 빵이 나오는 걸 목격한 아내는 잠깐 고민하다 냉큼 마지막 사람 뒤로 가서 섰다. 술빵을 사는 아내를 기다리며 우리는 어항 속에 쌓여 있는 굵고 긴 다리를 가진 대게들을 둘러보고, 떡볶이며 튀김, 탕후루 같은 간식을 파는 가게 앞에 모형 음식들을 구경했다. 지붕이 있는 시장 안이라 우산을 접었는데, 아이는 그 접은 우산의 손잡이를 꼭 붙들고 유모차에 앉아 이것저것을 탐색했다.


술빵 한 덩어리가 든 봉지 역시 아이에게 넘어갔다. 접은 우산과 술빵 봉지가 대롱대롱 아이 양손에 매달려 있었다. 우리는 아바이 마을을 가기 위해 시장을 통과하여 갯배선착장으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 오던 비는 어제 출발할 때처럼 다행히도 그쳐 있었다. 청초호에서 동해로 통하는 100m 좀 안 되는 물길을 지나는 갯배가 오래전에는 아바이 마을로 가는 유일한 운송수단이었다고 하였다. 운치 있다. 지금도 차를 타고 가려면 대충 5km를 돌아가야 한다고 하니 경제적이기도 하다. 얼마 안 되는 뱃삯은 반대편에서 계산한다고 하여 우리는 바로 승선하였다. 조심스럽게 유모차에 탄 채로 아이를 들어 '응차' 배에 올라탔다. 우리 외에는 여행객은 없었고 아바이 마을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들과 동남아인나 인도인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들이 타 있었다. 갯배 중앙 바닥으로는 쇠붙이로 된 틀이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붙어 있었고 그 틈에 역시 쇠로 된 굵은 와이어가 달려 배의 앞과 뒤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와이어는 배 양쪽에서 바다로 들어가 물길의 양쪽 끝까지 길게 연결되어 있었다. 사공? 한 명과 배에 탄 외국인 몇 명이 함께 독특하게 생긴 갈고리로 그 와이어를 잡아당기자 배가 움직였다. 아바이 마을 쪽 선착장에 도착하였다. 다시 신중을 기해 유모차를 내리고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아바이 마을은 6.25 전쟁 중, 1.4 후퇴를 할 때 월남한 함경도 출신 실향민들이 정착한 집단촌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아바이'는 함경도 방언으로 '늙은이, ' 또는 '할아버지'라는 뜻이라고 한다. 90년대부터 관광객들이 찾기 시작하였고 '가을동화'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좁은 골목을 들어서니 양 쪽으로 식당이 줄지어 있었다. 아바이 순대와 오징어 순대, 튀김 같은 것들을 식당 밖 테이블에 가득 쌓아 놓은 곳도 있었다. 돌아다니는 관광객은 거의 없었지만, 식당 밖으로 나온 음식들과 테이블, 식당의 간판과 세로로 길게 늘어선 홍보용 플래카드 같은 것들이 골목을 부산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우리는 골목을 조금 더 들어가 아내가 찾아 놓은 식당에 도착했다. 순댓국 두 개와 아바이 순대를 시켰다. 아이를 위해 순댓국 하나는 다진 양념을 빼달라고 했다. 주문을 한 직후 아바이 순대가 아니라 오징어 순대를 시킬걸 후회가 되었다. 어차피 순댓국에 있는 게 아바이 순대인데... 웬만하면 순댓국은 어딜 가나 먹을만하였지만 아내가 찾은 이 식당은 특히 일품이었다. 나같이 음식 맛에 둔감한 자도 굉장히 맛있다고 느낄 정도이니.


나는 내 입맛을 '관대하다'라고 표현하는데, 내가 애초에 좋아하지 않는 비리거나(멍게, 조린 생선 같은) 식감이 텁텁한(감자, 고구마나 카스텔라 같은) 음식을 제외하면 대부분 가리지 않고 먹는다. 맛있고 맛없음의 스펙트럼이 있다면 '맛있다' 혹은 '맛이 괜찮다'의 범위가 나는 굉장히 넓다. 불은 라면이나 식은 설렁탕 같은 것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이에 비해 아내는 나보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많으나 음식의 맛과 상태를 꽤나 중요하게 생각한다. 뜨겁게 먹어야 하는 음식은 그릇을 따뜻하게 하여 온기를 더 잘 유지할 수 있게 만든다거나 MSG가 건강에 큰 영향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만 본인이 만드는 음식에는 절대 넣지 않는다던가 하면서. 아이는 나보다는 아내의 입맛을 좀 더 닮은 거 같다. 별로 가리지 않고 잘 먹고, 심지어 생선요리도 나보다 좋아한다. 다만 질긴 고기나 계란 프라이 같은 음식은 안 좋아하는 것으로 보아 식감을 꽤 중요하게 여기는 듯하다. 여하튼. 결론은. 음식 맛에 관대한 내가 맛있다니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지만 그래도 그 순댓국은 맛있었다.



아이를 위해 순대국 하나는 다진 양념을 빼달라고 했다.


아이는 순대 피는 질겨서 먹지 못했지만 속을 파내어주니 맛있게 잘 먹었다. 맑은 국과 밥 역시도 숟가락으로 야무지게 퍼 먹었다. 요즘 많은 부모가 외식을 할 때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을 쥐어 준다고 한다. 우리도 외식을 하며 그런 아이들을 많이 봐왔다. 우리 아이 역시 스마트폰을 굉장히 좋아하고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외식을 하거나 차를 타거나 할 때 스마트폰을 찾지는 않는다. 특히, 외식을 할 때는 오히려 집에서보다 차분히 잘 먹어서 긴장하고 있던 아내와 내가 안심할 때가 많았다. 나는 아이가 순해서 그런 부분도 있지만 오히려 먹는 것을 즐기고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뭐 무엇이 원인이든 큰 어려움 없이 아이와 즐겁게 식사할 수 있어 항상 다행이었다. 다만 먹는 중에 옆 테이블의 젊은 커플을 너무 빤히 쳐다봐서 실례가 되진 않았나 모르겠다. 아직은 사회적 관계라던가 매너 같이 좀 더 추상적인 개념은 이해 못 하니 뭐 어쩌겠나.


아. 점심은 먹지 못할 듯했다. 순댓국이 정말 맛있었지만 마지막 숟가락은 느끼함에 들지 못했다. 식당을 나와 접은 유모차를 펴고 아이를 앉히는데 조금 실랑이를 했다. 그래도 아이는 착하다. 이번에도 어떻게 설득이 된다. 관심을 돌리거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거나 해서. 육아는 힘들고 때로는 열이 오를 때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아이에게 고맙다. 우리가 잘 키운 게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건강히 잘 크고 있다고 나는 항상 생각한다. 첫 뒤집기를 할 때도, 첫걸음마를 떼었을 때도, 첫 단어를 뱉을 때도. 고맙다.


우리는 골목을 따라 걸었다. 아바이 마을을 빠져나오면 작은 편도 1차선 도로와 도로보다 조금 폭이 넓은 해변이 있었다. 가지고 온 삼각대로 사진을 찍고 울퉁불퉁 주차장을 지나 다시 갯배선착장으로 가 갯배에 올랐다. 와이어를 끌어 배를 움직이는 신기한 관경을 구경한 후에 속초중앙시장으로 돌아왔다. 시장은 아바이 마을에 들어가기 전보다 훨씬 활기가 느껴졌다. 아내와 나는 유모차를 끌고 크게 두 바퀴 돌며 시장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아이는 유모차에 앉아 고개를 들고 사람들과 가게들을 이리저리 구경했다. 반찬가게, 마른 해산물을 파는 가게, 옷가게 등 정겨운 모습과 시끌벅적한 시장 골목은 정겨웠다. 전통과자를 좀 산 후, 아이 손에 뻥튀기를 쥐어주고 시장을 빠져나왔다.


다시 동뿡이에 올라 차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영금정으로 향했다. 바다 풍경이 좋고 횟집으로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아직 아이는 회를 못 먹고 나와 아내는 술을 즐기지 않으니 횟집은 패스. 영금정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아이를 안아 낮은 언덕에 있는 영금정으로 올랐다. 사실 나는 아침을 먹은 이후 컨디션이 좋지 않아 작은 고단함에도 아내에게 투덜댔다. 아니, 아이를 안고 이 계단을 오르라고? 그래도 투덜대고 나면 항상 후회한다. 불평을 쏟아낼 땐 내가 맞다고 주장하지만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보면 결국 이러나저러나 크게 잘못될 일은 없었다. 매번 후회하는 걸 보면 사람이 바뀌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다.


헉헉거리며 정자에 오르니 기둥 너머로 동해 먼바다까지 볼 수 있었다. 파도는 거셌다. 바람이 거세다는 말이다. 바위로 이루어진 물과 뭍의 경계를 하얗게 인 거품이 넘나 들었다. 미시세계에서는 물이건 바위건 우리의 몸이건 그 속에 있는 원자는 거의 텅 비어 있다고 한다. 사람이나 물체가 맞닿았을 때 서로 통과하지 않는 건 전자기력의 반발 뭐 그런 거 때문이라고 한다는데. 바위와 그 위로 넘실거리는 바닷물 모두 사실은 거의 텅 비어 있는 무언가라니. 솔직히 잘 와닿지 않았다. 그래도 철썩, 쏴아아아아아… 사그라드는 파도소리는 마음속에 응어리 진 무언가를 덜어내 비울 수 있게 해 주었다. 그게 일상의 스트레스인지, 미래에 대한 걱정인지, 혹은 타인에 대한 질투인지, 자신에 대한 실망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수평선 먼 곳의 아련함으로 마음이 편안해지니. 나는 뻥튀기를 바스락거리며 먹는 아이를 안고 바람에 단발이 흩날리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영금정에서 바라본 바다는 파로가 거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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