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취 일대기.
경상북도에 있는 한 작은 도시에서 태어난 나는 어린 시절 대가족 속에서 자랐다. 아버지와 어머니, 남동생 외에도 할머니할아버지와 삼촌 셋-나중에 한 분씩 독립했다-과 함께 살았다. 아주 어릴 때에는 작은 양옥집 1층의 방 한 칸에 아버지 어머니와 셋, 동생이 태어나고는 넷이 지냈다. 그 주택은 아버지가 사회생활을 시작하신 후, 근처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조부모님께서 도시로 나오시면서 살게 된 곳이었다. 비슷한 2층 주택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좁은 골목의 끝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작지만 그래도 신나게 뛰어놀 수 있던 마당과 심지어 재래식 화장실도 밖에 하나 있었다.
국민학생일 무렵 우리 가족은, 1층에서 방 두 개짜리 2층으로 독립(?)하였고 나는 작은 방에서 동생과 함께 지냈다. 이사할 때 어른들이 2층으로 무거운 업라이트 피아노를 힘겹게 올리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 2층에 있던 주방 설비는 다 떼어내었고 실제로 식사는 여전히 1층에서 조부모님과 함께 하였지만, 그래도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설렘이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늦겨울에 1층에서 김치, 정체 모를 나물무침, 햄, 계란 등을 넣어 볶음밥을 만들어 2층으로 가지고 올라가 빌린 비디오를 보며 퍼먹기도 했다. 야간타율학습이 끝나고 늦은 저녁 집에 도착하면 드라마 <허준>의 마지막 5분 정도 남아 아쉬웠다. 불수능이 끝나고 ebs에서 하는 채점방송을 보며 가채점을 하다 허탈해했다. 그리고 마침내 대학생이 되며 그 집을 떠나게 되었다.
서울로 대학을 진학하며 나의 자취 라이프는 시작되었다. 아. 제대로 부엌이 갖춰진 원룸은 일을 시작하고도 꽤 후에 일어난 일이니 엄밀히 말하면 그전까지 자취라고 부르기엔 애매하긴 하지만. 원래는 수유 쪽에 사시던 오촌 아제 댁에서 하숙할 계획이었으나 사정이 생겨 그러지 못하게 되었다. 2월 말 아버지와 올라와 급히 방을 잡았다. 학교 정문 먹자골목을 지나 식당가 뒤쪽의 더럽지만 한적한 골목에 위치한 작은 자취방이었다. 반지하, 1층, 2층이 있었는데 나는 1층 끝 방에 들어갔다. 공용 화장실을 쓰고 겨울에는 보일러를 미친 듯이 틀어 뜨끈뜨끈 온기가 가득한 방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손수 자물쇠를 하나 사 추가 잠금장치를 달아주셨다. 3월에는 선배님들의 도움으로 용산에서 컴퓨터를 구입하고, 얼마 후 부모님께서 다시 올라오셔서 작은 냉장고와 선풍기를 사주셨다. 그러자 겨우 생활할 수 있는 구색은 갖추어졌다.
술이 취해 인사불성이 된 키가 멀대 같은 친구를 장정 여섯일곱이 힘겹게 운반(?)하여 대각선으로 재우기도 했다. 고등학생 때 어울리던 다섯 친구를 한꺼번에 초대해 좁은 방에서 시끄럽게 떠들며 민폐를 끼치기도 했다. 처음으로 담배를 배웠고, 청승스럽게 창밖에서 내리는 첫눈을 보며 ‘부활’의 <Never Ending Story>를 들었다. 가끔 어두컴컴한 골방은 우리 과 몇몇 아웃사이더의 피난처 역할을 했다. 자유와 방종을 넘나들며-그러나 큰 사고를 칠만한 깜냥은 없었다-, 대학 전반기 해방을 만끽하던 난 이 비좁은 첫 자취방에서 두 번의 새해를 맞이하였다. 3학년을 시작하자마자 군대 준비를 핑계로 휴학을 하고, 한 차례 컴퓨터 본체를 도둑맞은 후에 나는 이 방을 떠나게 되었다.
복학 준비를 하며 살 곳을 정하기 위해 여러 하숙집을 돌아보던 내게 학교 후문 바로 앞에 위치한 고시원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접해보는 너무나도 좁은 고시원 방은 그러나, 군생활을 버텨낸 내겐 감당할만한 공간이었다. 근처 하숙집이나 자취방, 원룸은 보증금도 컸지만 월세도 만만치 않았다. 보증금 없이 적은 월세만으로 살 수 있는 고시원은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던 어린 나에게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다. 특히나 열리는 부분은 얼마 안 되었지만 하늘을 볼 수 있다는 큼직한 창문과, 지대가 높아 전망이 좋은 운치 있는 옥상은 큰 장점이었다. 지금까지 지낸 공간 중에 군대 다음으로 가장 작은 이곳에서 나는 대학교 후반 2년과 재수 1년, 교직에 들어와서 반년, 총 3년 반을 머물게 되었다.
한여름 가장 더운 오후에 두세 시간 천장에 설치된 공용 에어컨이 우우웅 소리를 내며 시원한 바람을 토해냈다. 화장실은 합판을 벽으로 두 칸으로 나뉘어 샤워공간과 양변기가 각각 하나씩 있었다. 건조대와 냉장고는 공용 거실에 있어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거주 초반에는 아침에 식사용 머핀을 배치하여 가끔 챙겨 먹기도 하였지만, 어느 순간 이 서비스는 사라졌다. 방음은 전혀 되지 않아 옆방의 통화소리, 기침소리 등이 적나라하게 들렸다. 그래서 친구나 후배가 찾아오면 옥상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피자 배달을 시키면 헉헉 거리며 계단을 올라온 배달원이 분노의 심호흡과 함께 피자박스를 털썩 놓기도 하였다. 집 앞에 한솥도시락과 편의점이 있어 학교 내 학생식당을 이용하기 귀찮을 때 방부제에 푹 저린 간편 도시락과 컵라면을 사 먹곤 했다.
특히 임용시험을 한 번 떨어지고 삶의 의욕을 잃은 시기에 좁은 방에서 김영도의 <드래곤 라자>, <퓨쳐워커>, <폴라리스 랩소디>와 다나카 요시키의 <은하영웅전설>, 수십 편의 영화와 미드를 탐닉하며 현실도피 하였다. 기타도 칠 수 없는 좁은 공간이어서 ‘기타프로’란 악보프로그램을 이용해 상상력 만으로 작곡도 해보았다. 양자역학 교양서나 정치 교양서 따위를 읽고 지겨워하는 후배 앞에서 나 혼자 신나게 책 내용을 떠들기도 하였다. 사방이 막힌 좁은 공간 속이었지만 나는 어찌어찌 잘 버텨냈던 거 같다. 지금 생각하면 기특하다. 교직 6개월 차가 된 어느 여름, 긴 장마로 인해 방 앞 거실 천장에 물이 새기 시작했고, 방안의 꿉꿉함을 버티기 힘들게 되면서 이사를 결심했다. 그리고 여름방학 중에 3년 반 동안 머문 2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서 드디어 벗어날 수 있었다.
고시원을 탈출한 내게 6평 정도의 원룸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비록 침대가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스피커로 음악을 듣고, 냉장고 위에 티브이가 있었으며, 개인 화장실과 싱크대, 드럼 세탁기, 에어컨이 있다니. 3층에 위치한 그 작은 공간은 당시 내겐 광활한 광야였다. 또한 지하철역과 멀지 않았지만 그렇게 번화한 동네가 아니라 조용했고, 골목이긴 했지만 대로를 끼고 있어 어스름하지도 않았다. 안타깝게도 고시원 옥상 같은 탁 트인 공간이 없었고 다니던 대학에서 멀어지며 당시 친하게 지내던 이들과도 멀어짐에 다소 외로운 기분도 들었지만, 그래도 그 방은 내게 큰 안정감을 주었다.
퇴근하면 집 앞 작은 마트에서 종류가 다른 라면 두 봉지와 스팸, 참치를 사 집에 왔다. 다이소에서 산 양은냄비-건강에 안 좋다고 하더라-에 끓여 참치와 돼지기름이 둥둥 뜬 정체불명의 라면을 먹으며 인터넷 커뮤니티를 돌아다녔다. 거의 매주 금요일 혹은 토요일 출근(?)하던 바에서 자정이 넘어 택시를 타고 귀가하다 집 근처 롯데리아에서 작은 햄버거를 사 먹고 들어와 그대로 잠들었다. 다음날 늦은 아침 근처 순댓국집이나 갈비탕 집에서 해장을 하고 방에서 뒹굴거렸다. 운동을 시작하며 꽤 거리가 있는 공원 체육시설을 달리기도 하였다. 수많은 책을 읽었고 작곡을 하고 담배를 피웠다. 수능 직후와 대학 초년생일 때를 제외하고 가장 사회에 덜 얽매였던 때였으리라. 학교를 퇴근하고 나서는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었고 그 작은 공간에서 나만의 지질한 즐거움을 만끽하며 시간을 낭비했다.
5년이 넘는 시간을 그 원룸에서 보내고 결혼 직전에 처음으로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다만, 말이 아파트였지 30년이 훨씬 넘은, 100세대가 안 되어 관리비도 직접 현금으로 내야 하는 곳이긴 했다. 외풍이 심해 가장 추운 겨울에는 실내 온도가 11도 정도까지 떨어졌고, 베란다에 부엌이 있어 수도관이 동파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지냈다. 그곳에서 혹한의 겨울을 두 번 보내고 겨우 운 좋게 지금 지내고 있는 임대아파트로 도망칠 수 있었다.
군시절과 고향집에서 살던 때를 제외하고 스무 살이 넘은 후에 오랜 시간 동안 내가 발을 뻗던 공간은 정말 코딱지 만한 방 한 칸이었다. 다행히 폐소공포증 같은 정신적인 문제라던가, 크고 화려한 공간에 대한 욕망을 갖지 않아 때로는 만족하며, 때로는 꾸역꾸역 버티며 살아올 수 있었다. 아마 내 몸뚱이 하나만 책임지면 되기 때문이었으리라. 사십에 이르고 아내를 만나고 아이가 생기며, 한 가족이 함께 지낼 공간이 필요하기에 이르렀다. 좀 더 크고 안정적인 울타리에 대한 이 필요성은 질투심이나 자격지심 같은 나의 속물근성, 세속적 욕망을 자극하곤 한다. 그리고 한때는, 물론 지금도, 꽤나 혐오하는 부동산 투자-라 말하고 투기라 이해하는-를 통힌 수익 창출에 대한 욕구도 다분히 꿈틀거리게 만든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왜 이런 주제를 생각한 걸까 스스로 되돌아보았다. 대한민국에서 사는 평범한 한 사람치고는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무지막지하게 조그만 공간 밖에 영위하지 못한 불쌍한 자신에 대한 위로일까. 그래도 그 속에서 누렸던 삶에 대한 추억일까. 나 이렇게 힘들게 살았어요라는 호소일까. 수도권 인구집중 문제에 관한 사회적 담론화 같은 거창한 이유는 아닐 거다.
잘은 모르겠다. 그저 현재 나라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이 어떤 공간 속에서 형성되었는지 돌아보고 싶었던 거 같다. 크게 활동적이지도 않고, 남의 시선에 신경을 쓴다지만 이를 위해 목숨을 거는 성격도 아니라 이런 상당히 열악한 환경에서도 버틴 듯하다. 그 때문에 나의 포부나 삶을 대하는 자세가 좁거나 소극적이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뭐 어쩌겠나. 아마도 이 글을 쓰는 가장 큰 이유는, 그 작은 공간 속에서 머물며 지냈던, 조금은 지질한 내 젊은 날의 장면들이 아련하게 떠오르는 게 즐거워서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