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한 효율성의 추구.
2010년 초반 어느 겨울 친구와 뉴욕을 여행 중이었다. 카투사를 전역하고 당시 미국 유학 중인 녀석이었다. 묽고 흐리멍덩한 코코아를 마시며 나는 그놈에게 흐리멍덩한 말을 했다. 넌 영어는 잘하는데 발음은 왜 이리 구리냐고. 그 친구가 순간 욱했다. 발음이 뭐가 중요하냐고. 한국 사람들은 발음 좋으면 영어 잘하는 줄 안다고 구박했다. 에스프레소 같이 진한 깨달음이 있었다.
맞다. 발음이 유창한 게 뭐가 그리 중요한가. 애초에 언어 센스가 뛰어나 영어뿐만 아니라 일본어도 능했던 녀석이 동두천 시끄러운 탱크 안에서 미군들과 훈련을 받으며 키운 영어 실력이었다. 영어 원어민과 일상 대화뿐 아니라 전문적인 화제까지 충분히 소통 가능한데. 그깟 혀를 좀 잘 굴리고 못 굴리는 게 무슨 큰 문제가 될까-참고로 그 친구 발음이 구린 게 아니라 내가 제대로 못 알아 듣는 거였다. 미국 대학에서 학부생 강의까지 한 친구다-.
실제로 꽤 오래전부터 영어교육에서는 단순한 발음과 억양의 유창함(fluency)이나 정확성(accuracy)보다 의사소통 가능한지(comprehensibility)와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지(intelligibility)가 언어학습에서 더 중요하다 여겨왔다. 특히나, 영어 사용자가 늘어나며 이런 점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단순히 미국인, 영국인 등의 모국어 화자(inner circle)뿐만 아니라 인도 영어, 싱가포르 영어, 필리핀 영어 등을 쓰는 사람들(outer circle), 우리나라나 일본인처럼 외국어로써 영어를 쓰는 사람들(expanding circle)까지 다양하다. 즉, 그만큼 다양한 발음과 억양의 영어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미국식 발음, 영국식 발음 만이 유창한 영어의 표준이라 말하기는 힘들다. 인도인과 한국인이, 홍콩인과 독일인이 영어로 소통할 수 있다. 다양한 발음과 억양의 영어로 서로 소통하고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의사소통은 성공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 중 다수는 발음으로 한 사람의 영어 능력을 섣불리 판단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특히, 이는 학교 현장에서 아직 어린아이들이 영어교사를 겪을 때 많이 일어난다-요즘 젊은 교사들은 발음이 좋긴 하다-. 한국에서만 영어를 공부해 온 토종 된장 발음을 지닌 나 같은 영어교사에겐 그래서, 이 지점은 고난이 되기도 한다. 다행히 어릴 때 팝송을 좋아해 많이 따라 불렀고, 전역 후에는 영국과 미국을 넘나들며 참고하기 좋은 발음을 지닌 후배 한 놈의 발음을 많이 따라 했다. 그나마 칠판 앞에서 조금 감출 수는 있다. 에휴.
이런 겉모습만으로 하는 섣부른 판단은 인간에겐 아주 익숙한 일일 것이다. 소개팅이나 면접 자리에서 첫인상이 그래서 중요하다. 외모지상주의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아. 범죄자의 외모가 판사의 판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다는 연구를 본 기억도 있다. 이는 애초에 생존을 위해 빠르게 유불리와 호감/비호감, 위협 요소 등을 판단해야 했던 우리 조상이 오랫동안 발달시켜 온 진화의 결과이다. 기술의 발달로 인한 짧은 시간 동안의 격변 속에서도 이런 본능은 변하지 않았다.
조금 결이 다른 이야기이지만, 나는 e스포츠를 좋아했다. 특히, 민속놀이(?) 스타크래프트(이하 ‘스타’)를 즐겨했고 그 게임 방송도 많이 보았다. 실제 스타에는 테란, 저그, 프로토스, 이렇게 세 종족이 등장한다. 그러나 외국인들 사이에서는 한 종족이 더 있다. 바로 ‘코리안.’ 오랫동안 스타의 세계에서 수많은 한국 프로게이머들이 최상위 신선계에서 군림해 오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한국인은 스타를 포함하여 e스포츠 여러 분야에서 날아다닌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테크트리’를 잘 만들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 게임을 운영하고, 전략을 짜고, 캐릭터를 육성시키는지는 플레이어 개인의 취향 문제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게임을 분석하고 이런 테크트리를 짜서 더 강력한 캐릭터를 만들고, 더 좋은 전략을 찾아내고, 그래서 결국 더 효율적으로 게임을 클리어한다. 예전에 한 제작사 측이 정말 작심하고 플레이 난이도를 어렵게 만든 게임이 있었는데, 한 한국인이 발매한 지 단 6시간 만에 클리어했다는 사건은 그쪽에서는 유명한 이야기다.
유창한 발음과 테크트리, 두 이야기는 달라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이야기이다. 효율적, 또는 경제적으로 행동하려는 인간의 본능 때문이다. 빠르게 누군가의 영어실력이나 성격, 호감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그 사람의 발음, 반응, 외모와 같이 즉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정보를 이용한다. 게임을 더 빨리, 더 잘 클리어하기 위해 효율적으로 테크트리를 짠다.
이런 식의 효율성에 대한 추구는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뿐만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모든 곳에서 관찰할 수 있다. 자본주의 경제학 이론에서 (현재는 그렇지 않지만 과거에) 인간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최적의 판단만을 내리는 효율적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 수많은 자기 계발 서적은 효율적으로 삶에서 원하는 목표-대부분은 부와 물질적 성취인 듯하다-를 달성하기 위해 존재한다. 어떻게 하면 연말정산에서 환급받을지, 어떻게 하면 업무를 효율적으로 할지, 어떻게 하면 살을 뺄지 등에 대한 팁이 넘쳐난다. 언어에서 대명사가 존재하는 이유라던가, 우리말에서 주어가 꼭 필요하지 않은 이유도 이런 효율성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이러한 효율성의 추구가 너무 과할 때가 있다. 발음만으로 영어교사의 영어능력, 교수능력을 평가하는 어린 학생들이 있는 것처럼. 게임을 즐긴다기보다는 그냥 남들보다 빨리 보스를 잡고 싶어 하는 한국의 게이머처럼. 회사나 사회의 구성원을 희생하여 스스로의 이득을 취하는 기업이나 정부처럼. 화석연료의 사용으로 인한 지구 온난화도 이런 이유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분 단위, 혹은 초 단위로 자기 계발을 하면서-자투리 시간에 독서하고, 운동하고, 재테크하고, 등- 스스로의 행복을 갈아 마시는 개인도 존재할테다.
그에 대한 반성에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과도한 자기 계발이나 삶의 성공을 쫓는 이를 경계하자는 제목의 책과 글이 많이 눈에 띈다. 현재의 행복을 찾기 위해 일을 그만두고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 말자고 하고. 이럴 줄 알았으면 열심히 살지 말걸 후회하기도 하고. 결국 모든 게 운이라 이생망이라 한탄하기도 한다. 이런 효율성의 추구에 대한 모든 반항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나는 지금과 같이 힘겨운 시대에 이런 멈춤과 위로는 꽤나 필요하다고 본다. 조금만 덜 자신의 이익을 좇고, 덜 효율적으로, 낭비도 좀 하면서, 조금은 게으르게, 흐르는 대로 살아가도 되지 않을까 싶다.
같은 맥락에서 어떻게 하면 남들에게 읽히는 글을 쓸 수 있는지 같은 고민도 좀 멈추고 싶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