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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댄스댄스댄스 Nov 28. 2023

읽기에서의 맥락과 추론.

적극적인 읽기.


Her painting


무슨 뜻일까요? 네. ‘그녀의 그림’입니다. 이 글을 읽는 누구나 ‘그녀의 그림’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대명사 she의 소유격인 her는 ’그녀의‘란 뜻을 가지고 있고, 동사 paint에 -ing가 붙어 명사인 ‘그림’이란 뜻이 됩니다. 초등학생, 중학생들도 거의 다 이해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렇게 이해하면 끝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문장 속에서 저 표현을 만난다면, 단순히 ‘그녀의 그림’이라고만 이해할 경우에 우리는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 그림 속에 그녀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경우라면? 아니면 그녀가 어떤 화가에게 풍경화를 의뢰하고 돈을 지불한 경우도 있겠죠. 혹은 본인이 직접 그린 어떤 그림일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위 표현은 경우에 따라서 ‘그녀를 그린 그림’이 될 수도 있고 ‘그녀가 소유하거나 구입한 그림’이 될 수도 있으며 ‘그녀가 직접 그린 그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제가 말하지 않은 어떤 다른 뜻으로 쓰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좀 더 정확한 의미는 맥락(context)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는다면 파악할 수 없습니다.


우리말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짠쉐와 경뒈는 학생이다. ‘그(1)’는 ‘그(2)’에게 500원을 빌려주었다.


위 예시에서 그(1)와 그(2)는 각각 누구일까요? 우리는 위에 주어진 정보만을 가지고 두 대명사가 각각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만약 위 두 문장 사이에 ‘짠쉐는 주머니에 500원이 있었다’는 문장이 추가된다면, 우리는 ‘그(1)’가 ‘짠쉐’이며 ‘그(2)’가 ‘경뒈’임을 쉽게 추론할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 잠깐, 언어에 대명사가 왜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네이버 사전에 따르면 대명사(代名詞)란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을 대신 나타내는 말. 또는 그런 말들을 지칭하는 품사’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말에는 ‘나,‘ ’너/당신,’ ‘그,’ ‘그녀,’ ‘그것,’ ‘그들’ 등이 있고, 영어에는 I, you, s/he, it, they와 각 대명사의 격에 따른 변화들, 그 외 일부 정도가 있습니다.


대명사를 쓰는 가장 보편적인 이유는 간편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중학생의 이름이 “박짠쉐아브라카다브라”라고 합시다. 대명사 없이 우리가 이 친구의 아침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면 아래와 같이 정신없는 글이 될지도 모릅니다.


“박짠쉐아브라카다브라는 일찍 일어났습니다. 박짠쉐아브라카다브라는 이불을 개고 이를 닦습니다. 박짠쉐아브라카다브라는 교복으로 갈아입습니다. 박짠쉐아브… 헉헉.”


그래서 처음에 ‘박짠쉐아브라카다브라’를 소개하고 나서 그다음부터는 더 간단히 말하기 위해 ’그‘라 바꿔 부릅니다. 우리는 암묵적으로 ’그‘는 3인칭 단수 인간 남성 명사를 뜻하는 대명사로 쓰자고 약속했거든요. 물론 대명사뿐만 아니라 ’그 학생,’ ‘그 소년,’ 혹은 ‘그 못생긴 자식’ 등 조금 다른 방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보통 이를 언어의 경제성(economy of language use)때문이라고 합니다. 좀 더 짧고 간단하게 원하는 바를 전하기 위한 방식이라고 보면 됩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많은 것을 얻고자 하거든요. 우리가 느끼는 감각은 끊임없이 뇌에 자신이 얻은 정보를 전달하지만 뇌는 그중에 집중하거나 강렬한, 혹은 필요한 일부의 정보만을 처리합니다. 그래야 과부하에 걸리지 않거든요.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의 촉감이나, 낮 동안 밖에서 들려오는 일상소음, 지금 여러분이 읽고 있는 스미트폰 화면을 둘러싼 테두리라던가 다른 주변 풍경을 집중하지 않으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


결국 언어 역시 인간의 필요에 의해 생겨난 상징물이다 보니 당연히도 그런 경제성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런 경제성을 추구하다 보면 잃는 것도 생깁니다. 정보가 축약되고 추상화됨에 따라 듣거나 읽는 이는 이를 추론(inference) 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즉, 한번 더 생각하고 고민을 해야 하고, 때로는 오해나 오독으로 헷갈리기도 합니다.


다시 위 예시를 가져오면, 마지막 문장에서 두 개의 ‘그’ 대신에 각각 ‘그(1’)는 ‘짠쉐’로, ‘그(2)’는 ‘경뒈’로 쓸 경우에는 좀 비효율적인 대신에 위에서 언급한 맥락이 크게 필요치 않습니다. 반면 원래 예시문의 경우, 경제적이긴 하지만 읽거나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각각의 ‘그’ 누구인지 파악하기 위해 맥락 속에서 정보를 찾고 추론을 해야 하는 것이죠.*


우리는 글을 읽으며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맥락을 파악하며 추론해 나갑니다. 때로는 위의 예시처럼 대명사나 대신하는 말(통칭 pro-form)이 가리키는 대상(referent)을 찾기도 하고. 혹은 ‘그러나’나 ‘그러므로’와 같은 접속하는 표현을 읽고 그 앞과 뒤에 위치한 내용의 관계 따위를 추론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글을 읽는다는 행위는 크게 봐서는 끊임없이 맥락을 파악하고 추론하면서 어떤 글에 대해 나름대로의 일관성을 만들어 나가는(coherence building) 과정입니다.


사실 글을 읽을 때뿐 아니라 우리는 살아가면서 너무나도 많은 상황 속에서 맥락을 파악하고 추론해야 하는 경우를 만납니다. 아래는 따끈따끈한 2024년 수능 기출문제입니다. 수능에 대한 저의 개인적인 문제의식이라던가 문항의 난이도 같은 걸 차치하고 본다면, 아래 문항은 이 글과 관련이 있습니다.


아래 지문은 인간이 타인의 표정을 읽을 때, 그 사람이 누구인지, 다른 이들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알아야 그들의 표정에서 감정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타인의 표정만을 읽고 감정을 맞추는 실험들은 통일된 결과를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출처: 2024 수능 영어 기출, 교육과정평가원


코로나 시국이 한창이던 2020년 즈음, 원격수업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던 시기에 줌 피로(Zoom fatigue)라는 신조어가 생겼습니다. 화상회의 프로그램-대표적으로 줌(Zoom)을 많이 써서 이 이름이 사용되었습니다-을 통해 오랜 시간 수업을 하거나 듣게 되면 가지게 되는 독특한 피로감을 뜻하는 거였는데요.


예를 들어, 교시의 얼굴이 카메라를 통해 전기신호로 이동하여 학생의 모니터 화면에 뜨는데요. 이때 학생의 화면 속에 뜬 교사의 얼굴은 원래 정보에서 많은 데이터가 깎여나가고 왜곡되게 됩니다. 즉, 교실에서 교사의 얼굴을 직접 볼 때보다 훨씬 부족한 정보가 화면에 뜨는 것이죠.


그런데 보통 타인과 소통하며 그/그녀의 표정을 읽을 때, 우리는 타인의 표정 변화의 원인을 우리 스스로에게서 찾는 경향이 크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글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표정변화-여기선 화면 전송 과정에서의 왜곡-에 대한 나름의 근거를 찾고 일관성을 만들어 나가려는 노력 때문입니다. 결국 데이터의 깎임으로 오는 표정의 왜곡에 대한 탓을 스스로에게 지우게 되면서 우리는 실제 수업 때보다 더 큰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다시 본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우리는 단순히 글에 주어진 단어의 뜻, 문장의 뜻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배경지식, 특정 표현이 가리키는 말, 앞 내용과 뒷 내용의 관계 같은 글 내외부적인 맥락에 비추어 끊임없이 적극적으로 추론합니다. 즉, 종이나 화면에 적힌 글을 읽는다는 행위는 머릿속에 그 글에 대한 나름의 해석, 오해, 일관성을 구축하는 과정이고 그래서 우리 모두는 같은 글이라도 각자의 방식으로 다르게 이해하게 됩니다.



* repeated name penalty라는 현상이 있는데, 똑같은 고유명사를 많이 반복하는 경우에 오히려 글을 읽고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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