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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댄스댄스댄스 Nov 18. 2023

중학교에서 공문을 읽으며.

교육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2019년 원래 근무했던 중학교로 돌아온 나는 연구부장을 하게 되었다. 명칭이나 구체적 업무에 대해선 이것저것 차이가 있겠지만 중학교에서의 업무분장은 대동소이하다. 크게 행정지원부와 학년부 정도로 나뉘는데, 행정지원부는 교무부, 연구부, 생활지도부 등 핵심부서와 상담, 교육복지, 창의적 체험활동 등을 다루는 부서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름에서 쉽게 유추할 수 있듯이 교무부는 학사, 출결, 교육과정 및 평가, 학생생활기록부 등 전반적인 학교의 학사행정을 총괄하는 부서이며 생활지원부는 생활지도, 학교폭력, 교복, 학생회 등을 담당하는 부서이다. 이름도 두리뭉실한 연구부에서는 무얼 할까? 연구부에선 기본적으로 교직원 연수와 장학, 교원능력개발평가(이제 곧 사라질 거 같다), 학교평가, 학교와 개인 포상 및 퇴직, 연구학교나 시범학교, 청렴업무 등을 담당한다.


보통 그래서 연구부장은 학교에서 가장 큰 교무실에 교감선생님, 안방마님 교무부장과 더불어 삼촌이나 외삼촌 역할쯤 한다고 보면 된다. 교무, 연구, 생활 부장은 경력이 꽤 되고 승진을 생각하는 선생님들이 많이 맡아왔다. 그래왔다. 약 10년 전까지는. 교육청은 학생수 감소를 대비하여 신규교사 수급을 꾸준히 줄였다. 내가 초임 때 기간제 교사 형님들이 많았던 이유였다. 2000년 대 초반 학교에 안착한 나이스와 행정 업무 시스템은 학교의 문서와 업무를 줄이기는커녕 늘려왔다. 경제 위기 상황 이후의 중학교 학생들은 항상 험악하고 다루기 힘들었다던 30년 경력을 가진 한 선생님의 말씀은 통찰력이 있었다-그분이 IMF가 조금 지난 시절 근무할 때 아이들이 험했다고 하셨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내가 처음 부임한 시기 학생들은 가히 혀를 내두를 정도로 심각했다. 그래서인지 점차 명예퇴직이 많아졌다. 전보 교사가 적은 비선호 학교는 당연히도 신규 교사 발령 비율이 높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저경력 교사가 부장을 하는 경우가 늘어왔다. 나도 그 저경력 교사 중 하나가 되었다. 7년 차에 연구부장을 맡게 되었으니 말이다.


당시 첫 학교에서 5년, 그리고 새 학교에서 1년을 지낸 나는 연구부장을 하기엔 경력도 경험도 미달인 상태였다. 그러나 결혼식 주례를 봐주셨던 당시 교장 선생님의 부탁을 거부할 수 없었다. 3월 한 달은 학교 적응하랴, 수업하랴 정신이 없었다. 2년간 쉬었다 와서인지 공문서 기안부터 나이스까지 학교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삭제된 상태였다. 업무에 익숙해질 무렵 깨달았다. 연구부장은 공문을 엄청나게 많이 받는다는 사실을. 그중 많은 수가 교직원 연수에 대한 홍보 공문이었다. 교과 수업이나 자기 계발, 스포츠와 상담, 힐링, 매체 활용 교육 등등을 받을 건지 여부를 묻는 공문이 하루가 멀다 하고 내려왔다. 가끔 시범학교나 연구학교, 특정 사업에 대한 계획서 따위도 내려왔다. 아마 당시 한 해 동안만 1,000 건 정도의 공문을 받았고, 일부는 다른 이에게 전달하고 일부는 직접 처리하느라 허덕였다.


수많은 공문을 읽으며 세 가지 느낀 점이 있었다. 첫째로 단어를 너무 가볍게 여긴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매체를 활용하는 교과 수업에 관한 연수 공문이 있다면, 그 계획서에는 분명히 ’정보처리역량‘을 함양하기 위해서라던가, 학생의 ‘흥미‘와 ’내재적 동기‘를 자극한다라던가, ’개인화‘ 및 ’개별화‘를 통해 개별 학생의 수준에 맞춘다라던가 따위의 표현이 넘쳐날 것이다. 하나하나의 표현은 어떤 탄탄한 이론과 근거를 바탕에 둔 무거운 교육학적 개념인데 많은 공문에서 이를 너무나도 가벼이 여기고 남용하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첫 번째의 연장선에서 가진 두 번째 느낀 점은, 공교육의 성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교사에게 점점 더 많은 짐을 지우고 있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학생생활기록부 작성을 할 때에 입시비리 근절을 위하여 점점 더 많은 제한 사항을 만들면서도 동시에 담임 학생의 긍정적 변화에 관해 구체적인 누가기록을 작성하고 종합적으로 서술하라 한다. 학생 평가는 준거지향, 즉 절대평가 방식인 성취평가제로 하라면서도 등급별로 학생 수를 균형 있게 만들 난이도를 요구하며, 특히 반별로 평균의 차이가 크지 않도록 난이도를 조절하라고 한다. 수많은 연수 계획서에서 이 내용을 꼭 들어야 성공적인 학생 참여와 학습을 하는 수업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어떤 시범학교, 연구학교를 꼭 해야 좋은 수업, 좋은 교육이 된다고 공문은 말한다. 그러면서 엄청난 수업시수를 매 년 채워야 한다. 정보처리역량도 끼워 넣고, 세계시민 교육도 끼워 넣고, 그러면서 진로도 정할 수 있게 해야 하고, 봉사활동도 하고, 때로는 일 인 일 악기도 하고, 힘든 수능 공부는 덤인가. 이거 하면 좋으니까 다 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느낀 점은 어떻게 보면 공포 같은 것이었다. 수많은 공문 너머에서 느껴졌던 아우라는 이 공문의 사업과 연수와 계획을 쓴 자들이 가지고 있는 공교육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이었다. 대학시절 교육사회학 시간에 쭈뼛쭈뼛 마르크스 이론의 기초 같은 걸 들었다. 제대로 이해는 못했지만 무슨 경제 체제가 하부구조이며 핵심이고 문화나 사회가 상부구조여서 경제에 좌지우지된다, 뭐 이런 얘기였던 것 같다. 이런 공문을 보면서 마치 이 하부구조에다 ‘경제’ 대신에 ‘공교육’을 집어넣은 새로운 마르크스주의 같은 느낌까지 받았다. 정확한 역사적 사실은 모르지만 순수한 형태의 마르크스주의는 실패했다고 배웠다. 사회주의적 관념들이 복지와 사회 안전망 시스템 같은 것으로 스며들어 냉철한 자본주의에 온기를 불어넣고 우리 사회를 균형 있게 해주고 있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지만. 여하튼 많은 교육전문가라 불리는 사람들은 공교육을 이렇게 요리하고 저렇게 변화시키면 결국 더 나은 세상이 될 거라 믿는 것 같았다. 아니, 교육‘만이‘ 유일한 해결 수단, 솔루션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출처: https://ko.m.wikipedia.org/wiki/토대와_상부구조


그러나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아래 칼럼에서 글쓴이는 미국 사회의 빈곤과 불평등이 공교육 시스템의 실패에서 왔다는 주장을 배격한다. 교육이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했다고 주장하였다. 되려 두터운 중산층 규모를 키울 수 있었던 경제적 성장의 결과물로써 좋은 공교육이 탄생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물론, 이 주장이 얼마나 신뢰롭고 설득력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나라 50-60년 대 이후의 경제성장이 공교육의 질 향상에 크게 기여하지 않았다는 자료도 있다(한국교육은 왜 바뀌지 않는가?, 2020, Michael J. Seth 저, 유성상, 김우영 역, 학지사). 하지만 교육만능주의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는 메시지는 충분히 받아들일만하다고 보인다.


https://www.theatlantic.com/magazine/archive/2019/07/education-isnt-enough/590611/


왜 교육만능주의에 빠지게 되는 걸까? 이는 교육에 책임 있는 자들이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만 열쇠를 찾고 있는 취객과 같기 때문일 것이다. 열쇠가 다른 곳에 떨어져 있을지도 모르지만 빛이 비치고 있는 가로등 아래에서만 열쇠를 찾는다. 어두운 곳을 더듬거리려 노력하지 않는다. 책임 지려 하지 않기 때문에.


출처: 세대 게임, 2018, 전상범, 문학과지성사


가로등 밖에 있는, 우리나라 교육이 바뀌지 않는 진짜 원인은. 모두가 알고 있고, 모두가 지적하기에, 이는 너무 식상한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그 이유는 ‘평가’에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대학 입시에 있고, 대학의 서열화에 있으며, 좋은 대학에 입학하면 사회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사회적 인식에 있다. 그 뿌리에는 ‘부의 축적 = 사회적 성공 혹은 서열’이라는 공식이 있다. 모두가 이를 알고 있지만, 많은 교육 전문가들은 이를 외면하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의 욕망을 거부하지 못해서? 힘을 가진 자들의 탄압이 무서워서? 혹은 책임질 일은 하지 않으려는 관료의 특성 때문에? 아니면 예산이 많이 들어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교육부나 교육청 등 교육의 큰 틀을 결정하는 데 책임 있는 자들 중에 이런 구조, 혹은 이런 사회적 인식을 바꾸기 위한 근본적인 논의를 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에 위에서 언급했듯이 공교육 안에서 수업을 좀 바꿔보자 하고, 학생 지도를 어떻게 해보자 하고, 교사 연수를 어떻게 해보자 하고. 공교육의 울타리 내에서 어떻게 해보고자 하는 이야기만 한가득 하고 있는 것 같다. 아. 그렇다고 공교육 내의 혁신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교육을 모든 문제의 솔루션으로 여기는 극단적인 태도를 경계하자는 말이니 오해는 하지 말자.


며칠 전 한 유튜브 정치 콘텐츠에 출연한 역사학자가 저출산의 원인에 대해 이런 분석을 하였다. 2015년 ‘흑수저’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되었고 합계출산율이 처음으로 1 아래로 떨어진 게 2018년이라고 하였다. 이 둘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였다. 그는 역사적으로 출산과 가족계획은 미래에 대한 판단에 영향을 받는다 말하며, 현재 신생아 관련 부동산 대출 정책이라던가 새마을 운동 정신에 대한 대통령의 언급을 비판하였다. 이런 정책과 발언보다 지금 젊은이들이 미래에 대해 긍정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하며 분석을 마무리하였다. 이런 지적과 분석에 나는 크게 공감했다. 공교육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런 식의 통찰력 있는 분석과 그에 맞는 책임감 있는 실천을 할 용기 있는 주체가 필요할 듯하다. 난 뭐. 깜냥이 안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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