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파 남자 영어교사의 몸부림.
부끄럽지만 현재 나는 중학교에서 10년 넘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다행히 내가 지나쳤던, 그리고 현재 근무하는 학교 아이들의 영어실력이 그렇게 높지 않아 큰 부담과 민원은 겪고 있지는 않다. 한때는 영어라는 언어가 좋아 어찌어찌 이 일을 하게 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길을 잘못 선택한 건 아닌가 갸우뚱하게 된다. 그러나 벌써 10년 넘게 걸어온 길이어서 이미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나도 잘 안다. 철밥통을 하나 찼다는 안정감이 이 일을 지속하게 하는 큰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영어를 가르치는 많은 사람들이 겸양을 떨며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 한다. 한국 사람의 겸손한 태도가 미덕인 문화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도 스스로 영어를 그다지 잘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평균적으로-당연히 outlier는 있다, 그리고 남녀차별을 조장하고 싶지도 않다- 여성보다 남성이 언어적 센스가 떨어진다. 스스로를 돌아보아도 그렇게 언어를 잘 배우는 부류의 인간은 아니었다. 수능 국어 시험은 항상 어려웠고 지금도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잘 못한다. 일본어와 스페인어도 배워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겨우 영어 하나 좀 깨우쳤다. 마흔이 넘어가면서 혀가 심각하게 굳는 느낌이 들고 수업 시간에 쉬운 단어도 잘 떠오르지 않거나 헷갈리는 실수를 점점 많이 하게 된다. 중학교 영어를 계속 접하고 있고 따로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탓이겠지만, 그래도 수업시간에 등줄기가 짜릿하고 긴장하며, 수업이 끝난 후엔 서글퍼진다.
나는 외국에 나가 영어를 공부한 적이 없다. 지방의 소도시 출신으로 평균적인 공교육 하에서 사교육은 영어과외 하나 대충 5년을 하였다. 그것도 성문종합영어를 기본으로 문법과 읽기 위주의 과외였다. 다만 과외 선생님께 좋은 영향을 받아 '당시에는' 영어에 크게 흥미를 가졌고 영어교육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대학교 1, 2학년 때는 거의 읽기와 쓰기 수업을 많이 들었다. 수능 영어만 팠던, 성문종합영어만 공부했던 과거의 후유증이지 않았을까. 문학 시간에 시를 읽으면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언어학 개론서의 첫 장에 있는 개념도 이해하지 못했다. 원서 한 페이지 넘기기가 힘겨웠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따라갈 수 있었던 기회는 '강독'과 '문법' 수업 정도였다.
당시 가족의 지원이 크게 없거나 의욕이 좀 떨어지는 어린 남자의 경우, 해외로 유학을 생각하거나 학원을 다니는 등 자기 계발을 위해 투자하는 생각을 잘하지 못하는 것 같다. 아니. 나만 그런 걸 수도 있다. 지금 젊은이들은 좀 다른 듯하다. 여하튼 군대를 전역한 후에 알바를 하며 돈을 조금 모았었다. 그 정도면 혼자서 어학연수를 생각할 법도 했을 텐데, 나는 MP3를 사고, 기타를 사고, 노는데 그 돈을 썼다. 복학 후에는 하필 영어교육과가 전공인 탓에 원치 않게 임용고사 공부를 시작했다. 먹고 살 일은 교사가 되는 것 밖에는 생각하지 못했다. 시야가 좁았던 거다. 그래도 그 덕에 복학 후에는 나름 영어 원서도 많이 읽기 시작했다. 영어교육론, 영어통사론, 영어사 등 영어라는 언어에 관한 학문과 응용학문 쪽은 재미도 있었다. 그러나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에서는 기가 많이 죽었다. 복학 후, 공부를 많이 시키기로 악명이 높았던 교수님의 수업 첫 발표를 영어로 했는데, 아. 떠올리기도 싫었다.
임용고사를 준비하던 무렵 2차에서 3차로 전형이 바뀌며, 1차는 선택형 지필, 2차는 영어 논술, 3차는 면접과 수업시연으로 상당히 긴 싸움을 해야 했다-지금은 다시 2차 전형이라고 한다-. 1차 선택형 지필평가의 경우, 그래서, 일반 영어, 즉 읽기 능력의 중요성이 굉장히 커졌다. 2차 역시도 영어로 몇 천 자를 써야 했다. 나는 기를 쓰고 영어교육과 영어학 관련 원서를 읽고, 영미 문학작품을 읽고, SAT와 GRE 문제까지 들여다봤다. 한 번 떨어지긴 했지만, 두 번째에는 운이 따라 합격할 수 있었다. 3차 수업시연의 교사 발화(teacher talk)는 상당히 정형화되어 있고 면접은 질문지를 미리 주고 자신의 답변을 구상한 후에 시행되어 다행스러웠다.
첫 학교로 발령을 받았을 당시에는 영어를 열심히 공부했단 자신만만함이 있어 수업도 영어로 해보고 수업지도안도 열심히 만들었다-물론 첫 발령 학교의 사악함으로 그런 열정은 금방 사라졌다-. 그러나 중학교였다. 아이들의 수준에 맞춘 수업을 구상하고 진행하면 할수록 나의 영어 실력이 깎여 나가는 느낌이었다. 열심히 공부했던 GRE 어휘는 순식간에 기억에서 지워졌다. 원래부터 영어 말하기를 어려워했지만 이제는 입을 열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때라도 휴직을 하고 어학연수를 다녀왔어야 했을까. 첫 학교에서 근무한 5년 간 나는 침잠했고 영어 실력은 끝없이 내리막길을 걸었다.
두 번째 학교로 옮긴 후에 다행히 영어를 더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생명연장의 꿈, 메치니코프. 대학원 파견조치가 되어 2년 간 죽도록 원서와 논문에 파묻혔다. 매 수업 아티클 리뷰와 학기말 과제, 논문 작성 때문에 영어 쓰기도 많이 하였다. 과제로 읽은 아티클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매시간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수업을 들었다.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읽기와 쓰기를 한 시기가 아닐까 한다. 심지어 영어를 쏼라쏼라 지껄여야 하는 일도 꽤 생겼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영어 읽기와 쓰기에 대한 자신감은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말하기는... 여전히 더듬거리고, 비문을 말하고, 때로는 억양과 강세를 틀리기도 하였다. 정말 외국에 나가 외국인과 부딪히며 생활해보지 않는 한, 영어 말하기에 대한 두려움은 극복하기 힘들 듯하다.
대학원 공부 이후 대략 5년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그래도 공부하던 관성에 의해서인지 원서와 논문을 손에서 놓지 않고 꾸준히 읽었다. 또한 중학교 교사이지만 일부러 고등학교 수능 문제를 매 해 풀어본다. 시간 안에 푸는 건 불가능하지만, 운이 좋으면 다 맞거나 1~2 문항 정도 틀린 결과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두 번째 학교로 옮길 때와 같이 다시 침잠하고 혀는 굳어가는 감각이 느껴진다. 언제까지 이 자신감 없는 수업을 버텨나가야 할지 모르겠다. 왜 그때 어학연수를 억지로라도 나가지 않았는지 후회가 되기도 한다. 대학원 공부는 이런 데엔 큰 쓸모가 없다.
나는 국내에서 영어를 공부한 남자 영어교사다. 요즘 젊은 남자 영어교사들은 영어를 상당히 잘하는 친구들도 여럿 보았다. 대부분 외국에서 공부를 했거나, 국내에서 공부하던 친구도 강남 대치 출신이거나 외고 출신인 경우가 많다. 그들의 수려한 발음을 들으면 부럽다. 영어라는 교과는 지식보다는 기능을 가르치는 과목이다. 읽기와 쓰기는 몰라도 말하기, 듣기 수업은 그래서, 여전히 부담이 된다. 내가 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자격에 회의를 느낀다. 전문직을 준비하던, 다른 살길을 모색하던, 굳어가는 머리로 다시 단어장을 들여다보던, 무언가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쉽지 않다.